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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Dec 24. 2023

빛의 기억

캐롤은 다 좋은데 종소리는 뺄 수 없는 건가. 지겨운데. 나는 그래놓고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듣는다. ‘성탄절 성가’ 하면 떠오르는 익숙하게 거룩한 분위기와 반복되는 주제들이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바흐가 좀 더 지겹다고 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영롱하게 울리는 관악기 소리가 반짝인다.

어둠은 이맘때쯤 일찍 찾아온다. 누군가는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동지 절기에서 왔다고 했다. 알다시피 크리스마스와 동지는 거의 비슷한 시기이고, 동지 때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진다. ‘가장 어두운 절기’인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낮이 다시 길어진다. 인간은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이 시기를 기념함으로써, 어둠 속의 빛을 소망하며 빛이 점점 다시 어둠을 이기는 걸 목격한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멋진 설명이지만 ‘겨울이 이르렀다’는 동지와 동일시하는 것만으로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좀 서운하다. 크리스마스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신화적인 이야기만의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트리의 전구가 되어, 대림절을 기념하는 촛불이 되어 반짝인다. 노란 불빛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마음이라도 데워줄 것만 같다. 사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에게 햇볕이 일찍 사라진다는 건 꽤 고역인데 밤이 되어 반짝이는 불빛은 꽤 힘이 된다.

이들을 빛내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고했을지 생각해 본다. 노역이었겠지, 라고 마음대로 판단하다가도 지하철 역사에 있는 트리에는 그걸 가져다 놓은 교회의 이름도 걸려있다. 노역이 아니라 정성이었겠지, 라고 혼잣말을 고친다. 방에 장식으로 걸어둔 보티첼리 화집을 아무 데나 펼쳐도 심혈을 기울인 성화가 나온다. 물론 먼저는 의뢰자를 위한 붓질이었겠지만, 신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그 정도로 노력하지 않았겠지. 허니 그것은 수고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반짝이면서 각박한 이 세계를 넘어선 따뜻하고 평화로운 차원을 약속하는 듯하다. 당신이 어렸을 때 친구 따라서 간 교회의 소등된 예배실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던 트리나 촛불이나 성극 무대를 기억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아니면 석가탄신일의 아름다운 연등회와 행진하는 신자들의 온화한 미소를 떠올려도 된다.) 그런 기억은 딱히 삶의 고통에 대단한 해답을 주지 않는데도 우리를 위로한다. 절대자를 사랑하고 희구하는 마음은 삶이 이대로일 필요가 없다고, 다른 걸 바라봐도 된다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만 같다. 그건 빛이 말하는 가장 멋진 문장. 불빛을 눈에 담으면서 빛의 문장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자유로운 걸음을 위해서 무엇을 조소하고 일갈하는 일만큼이나 존경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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