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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Feb 03. 2024

신년 음악회 특집

          

*개인적인 사정으로 늦게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노래’는 가사에 곡조를 붙인 음악이라는 의미로 클래식 기악곡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신년 음악회 이야기를 다루고 싶어 ‘특집’이라고 올렸습니다. 융통성 있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새해에는 신년 음악회에 가는 어른이 되어야지.      


난 도무지 어른스러운 어른은 아니니까. 성인이 된 지가 언제인데 단골 식당이나 바도 하나 없는 데다, 술자리에서는 술 없이 어수룩한 소리나 하고, 애인은커녕 사람 때문에 부글부글 끓어댄다. 물론 독서는 좋은 취향의 표지가 되지만,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나는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신년 음악회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면서 새해를 다짐하는 어른이라면, 인격은 아니더라도 기호는 고상하다 할 만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연말에 1월 5일에 있을 서울시립교향악단 신년 음악회를 예약했던 것 같다.     


사이에 새해 벽두부터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부터 제1야당 대표 피습까지... (사실 1월까지 확대해서 보더라도 노조법이나 10.29 참사 특별법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슈 등으로 벌써부터 다사다난하다.) 해도 희망하기는 작년의 부정과 불행이 올해는 일소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편, 신년 음악회에 집착하는 것은 요새 유행하는 ‘새해 첫 곡’ 미신에 몰입해서일 수도 있다.     


‘새해 첫 곡’은 주로 케이팝 팬덤 사이에서 성행하는 미신인데, 새해 첫날에 듣는 노래의 가사대로 한 해가 흘러갈 것이라는 믿음 아래, 밝고 희망찬 가사의 노래를 듣는 풍습이다. 올해를 불태울 각오로 “불타오르네”를 듣는다든가, 올해의 주인공은 나라는 마음으로 아이브의 “I AM”을 플레이하는 식이다. 나는 신년 음악회가 이런 ‘새해 첫 곡’의 좀 더 고급스러운 버전이지 않을까, 예상했다. 그러나 여러 신년 음악회의 유래를 보면, 이 ‘새해 첫 곡’ 전통과 좀 궤가 다르다.      


우선 가장 유명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의 경우, 1939년 12월 31일부터 1940년 1월 1일에 진행된 음악회에서 시작되었는데, 나치 독일이 2차 대전 치하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열렸다는 점에서 최초의 목적이 매우 불순하다. 어느 정도는 내셔널리즘적인 관점에서 빈이 낳은 요한 슈트라우스 가문의 춤곡이나 다른 춤곡으로 레퍼토리가 고정되어 있기도 해서, ‘새해 첫 곡’처럼 선곡자의 개성이 개입될 여지도 별로 없다. 자신이 상상하는 기쁜 새해의 이미지가 어떤지에 따라 눈물 뒤의 웃음 같은, 약간의 비애가 섞인 웅장한 클래식이나, 그런지 록, 재즈 스타일의 힙합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새해 첫 곡’의 융통성에 익숙한 나에게는 다소 아쉬운 전통이었다. 대신 이 고전적인 스타일의 신년 음악회는 높은 몰입도와 일관성을 청중에게 전달하는데, 1월 초에 있었던 빈 필하모닉 앙상블 신년 음악회는 일관된 레퍼토리가 주는 산뜻한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신년 음악회의 전통을 알고 나서도 서울시향 신년 음악회를 되돌아보자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서울시향의 신년 음악회는 태고의 빈 필하모닉의 것과는 달리 ‘새해 첫 곡’과 좀 더 흡사하다. 춤곡이나 왈츠 레퍼토리가 아닌 곡들도 적극적으로 선곡하기 때문이다. 말러의 교향곡부터 차이코프스키 비창 같은 곡이 프로그램에 포함된 이력이 있다. 그만큼 꽤 틀에 구애받지 않는 선곡을 보여주는데, 이 점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올해 서울시향의 프로그램에는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이 신년에 어울리지 않는 파격적인 선곡으로 포함됐다.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기상곡”이나, 라벨의 “치간”도 전통적인 클래식 곡과는 결이 달라서 여러모로 인터미션 전 초반부 프로그램은 개인적으로 신선했다. 이 실험이 실험에 그치게 하지 않은 성시연 지휘자의 열정적인 지휘와, 서울시향의 견고한 연주력도 인상적이었다. (나만의 느낌이었다면, 클래식 초보자의 주관적인 감상에 그치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모든 청중이 연주와 지휘에 대단한 상찬을 보낸 걸로 보아,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짧은 인터미션 뒤에는 드보르작 8번 교향곡이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드보르작의 작품은 주류 클래식에 비해서 좀 더 애틋하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데, 찾아보니 완전한 클래식 본거지인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은 아니고 체코 출생이라고 한다. 8번 교향곡은 9번 교향곡만큼 박력 있는 전개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처연하고 서늘하게 아름다운 느낌이다. 마치 감정의 폭이 넓은 사람처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가 오고 난 뒤, 공기는 쌀쌀하게 춥고 그림자는 넓게 드리우지만 햇빛은 빛나는 늦가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날씨.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날씨가 마음에 갈피처럼 꽂혀 언제나 그날들을 그리워했지.    

  

꼭 그처럼, 교향곡은 나에게 새해의 시작점이라는 마디를 준 것 같았다.      


이것은 일종의 단절이라고 해야 할 텐데, 자신과는 고립되고 타자와 멀어진다는 의미에서 단절이 아니라, 사이클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질서나 관습이 작동되는 것을 끊어버리겠다는 의지에서 단절이다. 물론 시간은 끝없이 미래로 흐르기는 해도, 시간에 시작(과, 나아가 자신만의 끝)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고 문화다. 자연과 계절의 순환이 아름답기는 해도 정신에마저 ‘순환’을 요구하자면, 개개인의 의지와 욕망을 비웃고 체제, 현상 유지만을 권하게 된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단절, 일종의 ‘마디’가 필요하다.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고 말해야 한다. 그 마디가 주는 기세에 모든 소망을 실어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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