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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Jan 23. 2024

이센스

사람에 따라서, 이센스의 “The Anecdote”는 나스의 “Illmatic”에 비견되기도 한다.     


물론 어떤 걸 다른 것에 비교할 때 필연적으로 과장이 생김을 감안한다면, “The Anecdote”에 대한 청자들의 반응이 그만큼 뜨겁다는 의미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스의 음반은 당대 스타 프로듀서들이 참여한 블록버스터라면, 이센스의 음반은 1 DJ 1 MC 체제로 진행된 간결한 앨범으로 차이가 좀 나는 편이다. 굳이 따지자면 아티스트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음반이라는 점이 공통된다. 사실 그 자전성도 내용을 보자면 결이 다른데, “Illmatic”은 나스를 나고 자라게 했던 ‘뉴욕’의 도시 사회학적인 측면, 그와 얽힌 흑인 차별로 청자의 시선을 옮겨가게 한다. (“N.Y state of mind”가 묘사하는 뉴욕의 게토화나, “One love”에서 수감된 친구를 언급하는 부분과 같이) “The Anecdote”의 이센스는 나스와 달리 자신의 고향에서 인종적 소수성을 지니지는 않아서 ‘이방인’으로서의 그의 소회는 좀 더 미묘하고, 자기반성과 수치심이 공격적인 분노와 함께 얽혀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착종에 매력을 느꼈다. 자기반성과 수치심이든, 공격적인 분노든 가요를 포함한 대중문화에서 그렇게 익숙한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문화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분노가 많은 사회이면서도 분노를 억누르려는 사회이기도 하다. 사실 분노가 많은 것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는 볼 수 없는데, 분노나 분노가 만드는 갈등은 사회적 소수자들의 의견을 표현하고 그들의 견해를 사회에 반영할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소수자들의 분노를 많이 자아내면서도 그들의 분노를 소모적인 불평불만으로 취급하고 무시하며 더 많은 분노를 불러오고는 했다. “별 게 다 불편”이라 말하는 사람들. “초중고 똑같이 나와 지잡대가 어쩌니 하는 그 단어들 하며 대화 주제가 이미 노예들 같”은 사람들.. 그들은 “A-G-E”가 지적하듯, “몸과 혼을 (니 모르는 새) 이 나라가 묶어” 놓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작 유행”이나 쫓아다니는 힙합 씬의 “copycat”과 거의 같은 부류다. 이센스 앨범에서 사회 비판은 힙합 씬 비판과 거의 중첩되고는 하는데, “A-G-E”도 비슷하다. 이후로 “The Anecdote”의 다른 트랙이나 이센스의 다른 앨범에서 사회 비판은 힙합 씬 비판과 겹쳐지며 “A-G-E”보다 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솔직한 공격성과 함께 하며 그를 다소 누르는 것은 자기반성과 수치심이다. 분명 그가 느끼는 분노는 “편모는 손들라던 선생님의 말”이나, “아빠도 없는 주제라고 쏴붙인 여자애 말”과 같은 사회를 향하지만, “아무 대답도 못하고 가만있던 난데” 하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The Anecdote”) 화자는 사람들의 비열한 비난에 겁을 먹고 입을 다물고 있었을 만큼 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로도 지켜주지 못할 만큼 비겁하기도 하다. 다른 래퍼들의 뜨기 위한 발악질이나 TV 출연들을 고깝게 보기도 하지만, 과거에 그 시스템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암시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 치부를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개털” (“Next level”) 같음을 지적하는 태도가 묘한 희열을 준다. 삶의 어떤 진실이 정확한 언어로 드러났을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일 수도 있지만, 자존감을 이유로 반성이나 회고라고는 하나도 없이 자기 포장에만 몰두하는 자의식 과잉의 세상이 얼마나 유치한지 느끼게 해 주어서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개털이다. “The Anecdote”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이름을 올린 아티스트도 개털이라면 만인이 다 개털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개털임을 악착같이 부정한다. 부정한다고 해서 가려질 게 아닌데도 말이다. 사람은 속물이 되기도 쉽고 ‘악의 평범성’에도 곧잘 빠진다. 불행하게도 그렇게 될 때가 많다. 역겨운 건 속물처럼 굴고도 속물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우겨대는 추태다. 나는 거의 날마다 그런 인간들을 보면서 토악질하고 싶어지고, 인간 혐오증으로 상담 치료라도 받고 싶을 지경에 이르렀다. 여성가족부 폐지되는 걸 보고 싶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에 투표하고, 장애인이나 LGBT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조롱하고,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잘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멍청이들을 보면서, 이딴 새끼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슬퍼지기도 한다. 그때 이센스의 노래를 들으면 이 멍청이 새끼들도 다 한때고 나도 내 글로 그 새끼들을 열심히 디스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씩씩한 각오가 생긴다. 용서고 화해고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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