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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Feb 27. 2024

린킨파크

다들 선을 넘으려고 작정하기라도 했나.     


내가 글도 못 쓰고 현실에 치여 지내는 동안, 참 많은 소문과 난리가 있었다. 명색이 메이저 언론사라는 곳에서 무용담처럼 보도한 축구선수들의 싸움부터 외모 품평에 열 올린 악플러들을 모 연예인이 고발하기로 했다는 소식까지. 심지어 이 정도는 애교 수준. 영부인 이름 뒤에 ‘여사’를 붙이지 않았다고 행정지도를 받은 방송국이나 대통령에게 항의했다는 이유로 경호원들에게 얻어맞고 끌려 나간 대학생 소식에 이르면, 내가 미쳐도는 건지 세상이 미쳐도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미 말세는 이르렀고 신은 재림해야 되는 것 아닐까? 이 토 나올 만큼 짜증 나는 시기에 나는 린킨파크의 “Given Up”을 들었다. 제목처럼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     


린킨파크도 ‘선을 넘는’ 밴드라고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그 시절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들이 데뷔한 2000년에 나는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등장은 센세이션 했고, 하이브리드라느니 ‘새로운 결합’이라느니 대단한 말잔치가 벌어졌다고는 들었다. 이후 그들은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인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고, 내가 그들을 알게 된 2007년 이후에는 이미 ‘사골파크’라 불리고 있었다. 힙합과 락을 결합시킨 그들의 하이브리드 스타일은 그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작곡함에 따라서 진부해졌다고들 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된 나는 그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중학생이었으니까. 언제라고 그러지 않겠냐만은, 중학생 정도 되면 모든 걸 부숴버리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 된다. 특히 내 머리 하나 뉘일 곳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들이라면 더더욱. 린킨파크의 예전 앨범들을 탐색하던 내가 새롭게 좋아하게 된 곡은 “A Place For My Head”였다. 그 노래를 좋아하면서도 가끔은 나의 취향을 의심하고, 노래에 겹쳐보았던 나의 감정을 의심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의심이 부질없다는 것을 안다.     


청소년의 감정만큼이나 린킨파크라는 밴드는 평가절하당하기 쉬운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락과 힙합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들이 혼용된 음악 스타일은 이도 저도 아니라는 소리, 쉽게 물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를 들어 “쇼미더머니”에 나왔던 바스코라는 래퍼는(지금은 활동명을 ‘빌스택스’로 바꾸었다.) 락 스타일의 경연곡을 했다가 ‘린킨파스코’라는 멸칭을 얻었는데, 그 별명에는 앞에서 언급한 장르적인 애매함, 철 지난 유행의 뉘앙스가 있다. (전자보다 훨씬 부당하지만)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밴드 멤버도 은밀하게 밴드의 평가절하에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누군가는 보컬 체스터 베닝턴의 자살을 과도하게 물고 늘어 것이다. 그렇대도 누군가는 멸칭을 감수하고 린킨파크를 오마주 하며, 그들을 찾는다. 언젠가 라디오 DJ이자 음악인인 배철수는 린킨파크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음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지 않은가, 하는 말을 남긴 적도 있다. 그 새로운 시대도 이미 수십 년을 지나오기는 했지만, 장르적인 실험과 함께, ‘아름다운’ 사랑이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의 상처를 과감하게 드러낼 수 있다면 언제나 새로운 시대의 음악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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