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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Mar 05. 2024

비밥 재즈

언니는 기승전결 있는 노래는 별로 안 좋아하네. 맨날 재즈나 힙합 같은 거 듣고.

그건 뭔가 ‘가볍지가’ 않잖아.      


거실을 물걸레질하면서 대답해 주었다. 가볍지 않은 걸 들으면 힘차게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다고. 기승전결의 구성이 이끌어 주는 감정은 대부분 엄청 서정적인데, 그건 딱히 ‘일상적’이지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생활에는 힙합 비트처럼 집요하게 반복적이거나 재즈처럼 갑작스러운 변주가 있다. 해서 그것들을 들을 때는 일상 안에 있다는 안온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재즈 중에서도 비밥을 좋아한다. (특히 찰리 파커의 비밥이라면 몇 시간이라도 들을 수 있다.) 스윙 재즈보다 더 ‘난해해서’이다. 스윙에는 춤을 출 수 있지만 비밥에 춤을 추기란 어렵다. 매우 춤을 잘 추지 않는 이상, 다들 어물거릴 것이다. 나는 그 어물거림이 좋다. 애초에 춤을 못 추기도 하고, 다들 더럽게 어물거리고 실수하며 살아가는 것이 잘 보여서 마음에 든다. 평상시에는 어떻게든 감추고, 윽박지르고, 변명할지라도 말이다.     


비밥 재즈의 기원 이야기도 좋아한다. 비밥은 전후의 산물이다. 나는 무언가를 2차 대전에 대한 반응이자 산물이라 설명하면 무턱대고 (더) 좋아지는 징크스가 있다. (물론 전쟁 작전이나 무기에 대한 게 아니라 사회 안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미드센트리 디자인이 그렇고, 여성의 직접 선거권이 그렇고, 아렌트나 레비나스의 말,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뒤샹이 열어젖힌 현대미술도 그렇고... 정말 끝없는 목록을 이어 붙일 수도 있다. 문제적인 시대에 절대로 만족하지 않으며 불만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새로움을 모색하는 건 멋진 일이다. 오직 자기 소속 집단의 이익만을 놓고 불만을 표하며, 그 외 다른 사회  의제에 문제를 제기하는 걸 금기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 동경하게 된다. 1940년대 중반 당시에 활동하던 재즈 연주자들이 불만스러워했던 것이 기존의 재즈 스타일이든, 기존의 재즈 스타일이 머금고 있던 사회의 위선이든, 둘 다이든, 소위 ‘새로운 재즈’는 다시 들어도 새롭다. 복잡한 멜로디와 화성, 때때로 몰아치는 듯이 빠른 리듬, 격렬한 즉흥연주는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어서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런 예측 불가능성이나 불규칙성은 악기의 질감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도 같다. 명확한 멜로디 라인도 없고, 리듬도 불규칙한 베이스 즉흥연주를 듣고 있으면 ‘아, 내가 정말 베이스를 듣고 있다!’, 고 느끼게 된다. 악기의 음향이 음악적 형식에 별로 종속되지 않으니까. 마치 좋은 대화처럼 각각의 소리가 죽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느낌이다. ‘민주적’이라고나 할까. 악기 고유의 소리가 도드라지는 것은 재즈 특유의 음계인 ‘블루 노트’만큼이나 독특한 이 장르의 특징이다. 전통적인 음계를 위반하는 음이 희로애락만으로 표현되지 않는 미묘한 감흥을 남긴다면, 전통의 미덕인 ‘종합’을 위반하고 기꺼이 흩어지는 선율은 삶에서의 갈등이나 생각의 편린을 억지로 봉합할 필요가 없다는 자유로움을 준다. 어떤 아름다움은 그렇게 아름다움의 지평, 감각의 지평, 새로움의 지평을 넓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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