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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Mar 20. 2024

김심야

예쁜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쁜 노래 가사도 마찬가지. 너를 별, 나는 달, 우리는 우주인 세상 속에서 자의식은 구름처럼 넘실거린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고 알려줘도 알아먹지 못한다. (정작 그 말을 남긴 이성복 시인마저도 ‘아우슈비츠 유대인’을 자기 비유에 사용하는 걸 보면 자의식 과잉의 함정을 피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아름다운 노래 가사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힙합의 관용구인 머니 스웩을 두고두고 비웃으며, 반체제적 음악으로 출발한 포크나 락에서도 사회비판적인 내용보다는 사랑과 서정을 찾는다. 물론 개인의 호오와 취향의 영역은 존중받아야겠지만, 노래의 아름다움과 서정성이 타자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예찬하는 데만 머무른다면 문제가 된다.      


오늘 내가 일하는 건물 쓰레기통 앞에 종이 쪼가리가 버려져 있었다. 종이에는 이 기관이 서울시 기관 중에서 평점이 최하위이며, 남녀 할 것 없이 직원들이 불친절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용에도 별로 동의할 수 없었지만 종이가 어느 팀에 전달된 것도 아니고, 쓰레기통 앞에 버려져 있었다는 데 화가 났다. 건물 밖 게시판에라도 붙여놓던가, 아니면 쓰레기통 안에 버리든가.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불만에도 진지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도 밖에서는 예쁜 노래를 듣고, 예쁜 여행지를 다니고, 불쏘시개 같은 책에서 느끼한 구절을 발견하면 사진 찍어서 공유하겠지? 언제 어느 때고 생각한 거지만, 공공기관에서 파트타임을 하면서부터는 그런 마음이 커진다. 종이를 북북 찢어서 버렸다. 퇴근할 때는 일 생각도 두고 가야 하는데 찝찝한 마음은 내버려지지 않았다.     


날씨도 울적한데 울적한 노래를 듣고 싶다.

울적하면서도 싸우고 찌를만한 기세의 노래.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는 말이 늘 맞는 얘기는 아니다. 친구는 나와 다른 사람, 다른 세계로서 다른 법칙과 취향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김심야를 알게 된 데는 이센스의 추천이 컸다. 가사마다 심야를 찾으며 ‘샤라웃’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에게 정이 들지는 않았는데, 이센스는 블랙넛을 추천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 자기도 안 쓰는 저질 가사의 래퍼를 추천해 준 걸까. 샤라웃은 나스까지만.) 노래를 들어보니 랩은 과연 문외한이 듣기에도 훌륭했으나, 블랙넛까지는 아니어도 공격적이고 난해한 가사에 적응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interior”의 가사 중에는 “내시 새끼들은 고자질에 고자질이지만 고자니까 내가 봐줬지”라는 구절이 나온다.) 힙합에 아무리 ‘19금’이 많다지만 이 정도의 수위를 리스너가 감당할 수 있을까. 다른 걸 들어봐도 몇 초마다 등장하는 인간의 생식기 혹은 ‘bitch’의 향연... 나는 이센스가 심야 타령을 멈춰주길 원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김심야의 노래에 스며드는 일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김심야의 어떤 가사는 좋아하지 않는다. 나도 나의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고 김심야도 김심야의 모든 걸 좋아하지 않을 테니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어떤 가사는 김심야만이 할 수 있는 가사처럼 느껴진다. “옥탑 월세도 제때 못 내는 나에게 이 시절을 즐기라고 말하는 내 친구는 전 과목 fail 뜨고 서울 귀국 준비 중 내 친구는 진짜를 보여주려다 의경 준비 중 내 친구는 진짜를 보여주려다 땅개 준비 중 먹고살기 힘든 건 똑같은데 알맹이 꽉 찬 거 하려는 애들만 존나 배고프지” (“season off”) 같은 가사들. “아직 나는 다 처음 같지 아주 가족 같아 여기 모든 게 5년 굴러 다섯 달짜리랑 비교돼야 하니 나는 머뭇해” (“WIYM”) 같은 표현들. 솔직함이 언제나 미덕이 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처지를 까발리고 타인의 허세를 비웃으며, 부조리한 상황을 염세하는 태도에는 특별함이 있다. 음반의 완성도에 비해서는 대중이나 리스너들의 반응이 잘 따라오지 않는 현실을(나름 유명 래퍼지만) 행복한 체, 만족한 체 포장하지 않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직시한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곡을 발매한다. (물론 인터뷰에서 ‘내려놓고 싶다’는 말을 한 적 있지만, 이후에 곡을 냈다.) 대개 암울한 현실을 제쳐두고 희망을 노래하거나, 모든 걸 내려놓고 염세하거나 하는 것이 사람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마냥 ‘안될 거야 우리’식의 농담으로 눙치지도 않는다. 그의 현실 직시에는 공격성이 있다. 그 공격성에는 ‘bitch’도 생식기도 다 필요 없어지고, 나를 붙잡는 것이면 나든 누구든 떼어낼 수 있을듯한 씩씩한 마음이 생긴다.


*파일이 날아가서 늦게 올립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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