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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Mar 26. 2024

산울림

음원 사이트의 차트에는 각각의 스토리가 있다. 어떤 노래는 특정한 단어를 반복해서 ‘밈’을 만들었고, 어떤 노래는 틱톡 챌린지로 인기를 끌었고, 어떤 노래는 SNS나 커뮤니티 사이트의 입소문을 타고 ‘역주행’을 했다. 노래에 엮인 각각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아니지만. 문인 지망생이라면 ‘스토리텔링’을 탐닉해도 모자랄 판이나, 나는 노래 뒤의 전사가 노래보다 커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노래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해석의 말잔치나 설왕설래가 먼저 보여서 말이다. 정말 좋은 노래라면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도리어 레퍼런스가 되고 무엇의 전사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이 김수영의 말에 기대서 “온몸으로 시를 쓰”려는 것처럼.     


산울림은 전사를 가진 노래가 아니라 전사가 되는 노래를 부른 밴드일 것이다. 물론 그들을 이야기하면서 7․80년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산울림은 그 시대를 오롯이 재현하기보다는 시대의 결에 굴복하지 않는 엉뚱함과 순수함을 보였던 듯하다. 후대의 ‘엉뚱한’ 노래들이 작위적이리만큼 과한 유별남이나 폐쇄성을 보이지만, 산울림의 노래에는 당대의 권위나 엄숙주의에 대한 의식이 남아 있다. 그들의 기대를 조금 조소하는 의미심장함이 있다. 그들의 데뷔곡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만 봐도 “그녀 눈동자”는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고, “잎새 끝에 매달린 햇살”은 간지런 바람에 흩어져” 있고, “보얀 우유빛 숲 속은 꿈꾸는 듯 아련했”고 “우리 둘은 호숫가에 앉았지”만 이후의 일이 나와있지 않다. “아마 늦은 여름”, 화자가 계속해서 기억하는 “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신비로운 풍경이나 분위기 묘사에 힘을 주는 걸로 보아, (사건에 있어서는) 아마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근데 꼭 ‘아무 일’이 있어야 하나? 건전가요처럼 ‘하하호호’하거나 반대로 (검열 당국의 노파심대로) 야릇한 일이 있었어야 하나? 반드시 일차원적인 상상대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가 갖고 있는 담담한 서정성과 신비로움은 이 노래 제목을 경구처럼 인용한 수많은 노래, 영화 작품의 시원이 되었다.      


산울림의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로 많은 창작물에 아이디어와 용기를 제공하는 레퍼런스가 되었다. (당시 검열자들이 싫어하던 반말투의) “나 어떡해”가 주는 도도함 또는 소탈함, “내가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 거야”가 주는 유쾌함,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가 보여주는 도전 정신... 여타의 분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대중음악계에 있어서 산울림이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고 평가된다. 직후 밴드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심지어 (산울림으로서는 자식뻘인) 유명 밴드 자우림도 산울림 트리뷰트 밴드가 시초였다. 장르적인 실험, 연주력, 작곡 능력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사회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문을 표하고 다른 길로 새는 태도는 언제 봐도 귀감이 된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아티스트들조차도 산울림의 천진한 저항을 완전히 따르는 대신에 시대 안에서 갈팡질팡하기가 더 쉬우니. 산울림을 듣는 나도 똑같지만. 그렇다 해도 그 갈팡질팡마저 산울림이라는 배경 안에서 가능한 일. 산울림을 듣고 부르고 공부하는 이들이 갈팡질팡하면서도 자기 결을 잃지 않고 나아가기를, 어떤 어둠 속에서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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