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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Apr 02. 2024

자우림

자기에게 늘 다정한 표정이길 바라는 뻔뻔함, 진심과 영혼을 담은 태도이길 바라는 몰염치.

이 나라를 살면서 가장 진절머리 나는 일 중의 하나다. (너무 당연한 멍청함이라 반박하는 것조차 힘이 빠지지만) 굳이 반박하자면 먼저, 자신이 예의 없게 굴어놓고 상대는 다정하길 바라는 건 도둑 같은 심보다. 두 번째로는 자신이 설령 예의를 차렸다 하더라도 상대의 상태에 따라, 약간의 사무적인 태도나 무뚝뚝함은 있을 수 있으며, 무례한 언어적 표현이나 빈정대는 어조가 없다면 관용할 수 있어야 좋은 시민이라는 것이다. 굳이 미소를 짓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를 생각하는 언어나 표현이 있다면 그 자체로 ‘영혼’이고 ‘진심’이지 않나. 내가 전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안내를 해서 지치더라도, 힘이 빠져서 차마 생글거리면서 말하지 못할지언정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서 꼼꼼하게 안내를 해주었으면 그건 그거대로 당신의 소사가 잘되길 바란다는 내 ‘영혼 있음’의 증거이거늘. 내 ‘일부’ 민원인들은 (심지어 내가 진이 빠지도록 접수하는 걸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눈으로 봤을 때조차) 자신에게 진심과 영혼을 다하는 표정이길 바란다. 물론 자기들의 기본적인 예의 같은 건 팔아먹고 말이다. 징글징글한 인간들. 하긴, 제일 징그럽고 뻔뻔한 인간들은 이렇게 중요한 대민업무에 계약직 공무원도 아닌 공공근로 인력을 동원하여 싸게 부려 먹는 우리 기관 고위층이리라.      


‘진심’과 ‘영혼’ 하면 왠지 자우림이 생각난다. 자우림이 ‘진심’과 ‘영혼’의 상징이라고 믿는 팬의 입장이어서는 아니고, 자우림의 경력에서 가장 징그럽게 따라붙었던 비평이 ‘진심’과 ‘영혼’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이게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좀 유명한 대중음악 평론 사이트에서 ‘자우림’을 검색해 보면 알 것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수록된 2013년 앨범 이전, 혹은 그 이후까지도 자우림은 ‘인위적인 우울을 가장하는’, ‘진정성 없는’, ‘자의식 과잉’의 밴드로 평해지는 걸. 심지어는 락 페스티벌에 출연한 자우림을 보고 ‘자위림’이라고 비난한 진상 관객의 말을 빌어서 그들을 비난한다. 그 원색적인 비난은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입소문을 타고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누군가의 애창곡이자 애도곡으로 자리하면서 좀 누그러진다. (2014년 이후로 기억한다.) 지금 자우림을 보고 인위적이고 자의식 과잉이라는 식으로, 진실하지 않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잘 되면 그만인 이 사회의 결과지상주의 때문도 있겠지만, 사회에서 언급되는 ‘인위성’, ‘진정성’, ‘진실함’이 누구의 것인지, 어디에 동원되는지 알아버려서일지도 모른다.      


‘일부’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유달리 자우림 스타일을 비토 했다. 보컬이자 프런트맨이 여자인 경우, 자기들이 생각하는 장르성에 충실하지 않고 조금은 혼종적인 경우, 어떨 때는 엄청나게 경쾌하다가도 어떨 때는 한없이 우울한 곡 스타일, ‘컨셉추얼’한 앨범 등. 그들의 주요 비판 레퍼토리 중에는 왜 홀수 앨범은 밝고, 짝수 앨범은 우울한 느낌으로 인위적인 컨셉 놀이를 하냐는 것이었다. 수많은 컨셉이 범람하는 2024년에는 상상하지 못할 낡은 말이다. 왜 컨셉추얼 하면 안 될까. 왜 인위적이지 않아야 하며, 왜 진정해야 하며, 왜 진실해야 하나. 그전에 인위적인 건 뭐고 진실한 건 뭘까. 그 사람들에게 그런 고찰 같은 건 없었다. 이상적인 락 밴드의 틀을 만들어 놓고 안에 자우림을 비롯한 현실의 락 밴드들을 끼워 넣으려 했을 뿐이다. 지금 자신의 느낌이 맞다고 소리를 꽥꽥 지르는 거친 남자들. 자기들이 관심 있는 몇 가지 원색적인 주제를 낄낄거리며 노래하는 남자들. 심지어 그들이 추앙하던 밴드들에게도 없었던 모습이다. 고작 그 정도를 위해서 ‘죽은 자들의 무도회’ 같은 걸 상상하는 게 거짓되다고 말할 수 있었나. 지금 자기들의 생각과 감정이 맞다는 확신이 있다고, 자신의 ‘진심’을 내세워서 어설픈 결과물을 글이라고, 비평이라고 내놓을 수 있었나. 시간이 지나 대다수가 그 어설픔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는 대다수도 스스로의 어설픔도 받아들이지 않는 개인들이 된다면 어떨까. 내가 이렇게 느낀다고 상대를 겁박하는 대신에 타인을 배려하는 예의와 결과물을 만드는 일의 문법을 익힌다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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