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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희 Apr 23. 2024

이랑

내일은 말해야지. 아님 때려치워야지. 집에 돌아올 때면 일터에서의 불쾌함을 털어버리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고작 4시간인데, 참 많은 일들이 다 일어난다. 어쨌든, 내일은 말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민원인이 빠르게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네, 라고 혼잣말을 하는 건 무례하다고. 그따위로 내 업무를 몇 번 도와준다고 해서 별로 고맙지도 않으니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물론 적당히 돌려 말해야겠지만 어쨌든.     


새로 일하는 곳이 얼마나 싫은지에 대해서 말하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 거다. 돈은 조금 주는데 해야 할 일은 많다. 화장실을 갈 시간도 없다. (그래서 화장실을 가야 할 때면 가는 길에 정수기에서 물을 뜨려고 물병을 챙긴다.) 사용해야 할 시스템은 빌어먹을 정도로 구식이라서 일부 문서를 발급하려면 민원인에게 접수일을 물어봐야 할 정도다. 하지만 그들보다도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다는 점이 제일 싫다. 번호표를 하나만 끊은 채로 단체로 몰려오는 사람들, 어느 창구로 가라고 말해줘도 반대로 가는 멍청한 사람들, 다른 민원인 순서에 끼어들어 업무를 보려는 사람들, 일주일도 전의 카드 영수증을 잃어버렸다며 다시 뽑아달라고 징징거리는 사람들,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안내를 듣지도 않고 문서를 받아 가는 것도 잊어버리는 사람들, 자기들 안내를 떠넘기는 다른 창구 직원들, 나보다 일이 더 적은데도 틈만 나면 투덜거리는 내 앞 시간대 파트타이머들, 자기가 기분이 상하면 업무에 대해 물어봐도 짜증 투로 대답하고, 어르신이나 외국인이나 장애인들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욕하는 내 담당 주임... 아무리 개 같은 곳이라도 마음 둘 사람이 한 명은 있기 마련인데,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밖에 없는 일은 처음이라서 언제나 유감인 채로 있다. 물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말이다. 회사에 사람 만나러 가나, 일하러 가는 거지, 라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럴지는 알 수 없다. 당장 내일 잠수를 탈 수도, 다음 주가 고비일 수도 있다. 사실 좀 친해지면 스몰토크도 곧잘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록 예, 아니오, 정도 이야기하는 나에게 싸이코 주임이 말이라도 섞을라치면, (걔는 왜 나한테 친한 척을 하려는 걸까) 한 번은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사람을 싫어하는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나는 적어도 장사가 안 된다거나 벌이가 시원찮다거나 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연민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지고, 모든 인간들이 다 납작해 보이는 것만 같아서 걱정이다. 남의 악덕에 서사를 부여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악덕이 아니고서는 누군가의 서사를 알기라도 해야 할 텐데 현재 나는 그런 마음도 의지도 없다. 그래도 내가 편의점 계산기도 아닌데 타인을 ‘40대 남성’, ‘70대 여성’ 따위로 라벨링 하고 싶지도 않은데... 벚꽃이 아직 지지 않았을 때 나는 꽃이 만발한 일터 근처 하천 길을 걸으면서 이랑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를 들었다. 그래, 나만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도 날 미워해. 전부.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게 대하는 것만으로도 사랑 고백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지. 그것만으로도 마음대로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담담하지만 애달픈 이랑의 보컬이 “나는 자주적인 삶을 살리라고 생각했다”고 노래할 때는 눈물이 나오는 걸 참으면서 계속 걸었다. 주변 사람들은 털어버리라고, “요가 선생님도 맨 마지막엔 손과 발을 힘차게 털도록 시켰”어도 “하지만 왜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생각만큼은 쉽게 털어버릴 수가 없었다”는 가사는 눈시울을 계속 붉혔다. “운동을 하고 차를 마셔도 잠은 오지 않았고”라는 말을 나는 다 알지. 뜬눈으로 견딜 수가 없어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느꼈던 날들. “친구가 돌아오면 슬슬 잠이 들”지도 않았고 우리 집은 “한 번만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곳도 아니지만. “결국 내게 상처를 줬던 그 사건들은 사실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것도 알지. 하지만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고. 의도는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그래서 더 짜증 나는 거라고, 적어도 나에게 상처라는 것은. 사람들이 왜 나를 미워하게 되었는가, 나는 왜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적어도 나의 편의와 효용에만 집중해서 사람들을 쉽게 미워하지도 욕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늘 선의를 베푸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선의로 행동하기 위해서 애쓰려 하는데 왜 누군가는 그 선의를 쉽게 비웃고 미워하고 욕하는지. 왜 궁지에 몰린 사람의 얼굴에는 궁지가 드러나고, 사람들은 그 사람을 더욱 궁지에 모는지를, 벚꽃이 지고 비가 오고 날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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