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든 블로그든 인스타그램이든 해외여행에 대한 이야기로 넘쳐난다. 심지어는 여행이든 유학이든 모종의 이유로 해외에 갔다가 그곳에 정착하며 있었던 이야기를 전하는 경우도 꽤 흔하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면 ‘모 나라에 대한 환상과 현실’ 따위의 주제로 그려진 숱한 만화들을 볼 것이고, 브런치에도 비슷한 주제의 연재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게시물 속의 여러 나라들은 생각보다 불평등하고 차별적이며 생활하기에 불편하다. 자유니 평등이니 예술이니 운운하다가 비웃음을 당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이런 류의 주제들에 꽤 익숙해서, 특정한 나라들을 여행하러 갈 때는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걱정과 다짐을 하는 경우가 적잖다. 그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해외여행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사회의 비판과 담론마저도 해외여행객의 정신을 띄게 된다. 일일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 아무거나 틀어서 재생하더라도, ‘국제’ 코너의 뉴스 분석이 일부 인스타그램 ‘여행툰’의 불평불만만큼이나 피상적임을 알게 된다. 프랑스 총선에서 극우가 약진하고, 미국 대선 판에서는 총격당한 트럼프의 지지율이 약진한다고 호들갑을 떨어대지만 전혀 우리 일은 아니며, 우리의 구경거리라는 식이다. 심지어는 남의 집이 불타고 있으니 샴페인이라도 마시며 구경하자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프랑스 총선에서 극우가 약진했어도 여당이 될 수는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을 견제하려는 좌파 정당 연합이 집권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려주지 않는다. 트럼프가 상징하는 미국 사회의 혐오와 퇴행에 맞서, 새로운 대항마로 떠오른 해리스에 담아내는 미국 시민들의 희망과 연대는 ‘별로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설명이 생략된다. 물론 우리 사회가 이들 나라와 다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면, 이들 이슈에 대해서 심드렁하고 삐딱한 시선을 던져도 아주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지 않나.
한국은 프랑스와 달리 거대 수권 정당이 극우 이슈를 받아들여 ‘집권’하고 있다. 군 사망 사건이나 사회적 참사가 일어나도 극우적인 국가주의를 앞세우며 이유를 묻지 말라는 이가 우리 대통령이다. 4년 전의 미국과 꼭 같은 모양이다. 어느 정도의 양심이란 게 있다면, 세계 극우화의 물결에 대해서 분석할 때 지금의 한국도 포함시켜야 맞다. 그러나 아주 정부 비판적이며 정치성이 뚜렷한 예외를 제외하고, 한국의 자칭 논객들은 극우화되는 나라들에 한국을 절대 포함시키지 않는다. 장 마리 르펜과 마린 르펜은 국가수반이 되지 않았어도 잘도 떠들어대지만, 노조는 ‘조폭’이라 주장하고 5.18과 일본 위안부 및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인물을 방통위원장에 앉히는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모 나라에 대한 환상과 현실’ 따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치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며, 그저 집이 최고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과 닮았다.
그들의 분석과 담론의 대상이 한국이 되지 않는 까닭에, 어떤 현상 비판에서도 한국 사회와 한국인에 대해 예외를 두는 까닭에, 우리 사회의 불의함과 불평등함에 대한 비판과 대안 모색은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다. 외국에서의 여러 인종차별을 감지할 수 있다면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산재 사망 사고의 피해자가 된 사건에 대해서도 주시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어둠과 그림자에 대해서, 우리의 몫을 돌아 보야야 한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우리는 여행을 하든 무엇을 하든 이곳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