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 성애화된 세상에서

by 김남희

≪교회 여자들의 은밀한 삶≫이라는 책이 있다. 디샤 필리야라는 미국 신인 작가의 단편소설 9편을 엮은 소설집으로,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길지 않은 분량 안에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기독교 신앙의 교차성 문제를 밀도 있게 담아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라는 희곡집도 있다. 누구보다 교회 청년부에 진심이었던 혜인이가 혼전 성관계 때문에 신자들과 불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복음과 상황>이나 <뉴스앤조이> 같은 일부 기독교 언론, 혹은 일반 문학지에서 두 작품이 언급되면서 교회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도 미약하나마 시작되는 분위기다. 금욕의 종교라 불리는 기독교에도 변화의 바람이 부는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에서 신자, 특히 여성 신자를 분리시키고 정죄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이 아닌가. 또 소위 ‘성적 순결’이라는 이상은 그에 맞지 않은 상당수의 여성을 혐오, 대상화하는 기제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흐름은 세상의 풍조와 궤를 같이하고 있는가? 비혼, 비연애, 비섹스, 비출산을 의미하는 4非 운동이나 기껏해야 30퍼센트도 되지 않는 연애율의 사회적 현실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지는 것 아닌가? 여성의 성욕이 정죄당하지 않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데, 왜 거의 대다수의 여성은 그 권리를 별로 사용하려 하지 않는가? 나는 그게,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있어 과잉 성애화된 사회로 인한 피로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과잉 성애화된 사회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여성의 욕망 속에 존재할 거라고 믿는 사랑과 숭배도. 그래서 여성이 사회에서 수행하는 많은 활동들, 타인에게 행하는 도움도 시민의식의 발로나 상호부조 따위가 아니라, 사랑이나 성적 욕망의 표시로 생각한다. 여성은 이런 점에서 사회의 동등한 ‘동료 시민’로 대우받지 못한다. 여성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성욕을 충족할 수 있다 기대되는, 연애 관계 내지는 연애에 진입하기 위한 단계로 취급당했다. 여성이 인간관계에서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논의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여성의 다양한 정념은 무시당한다. 여성이 상대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상대가 남성이라면 특히나, 여성을 연애의 틀에 가두어놓으려고 안달을 낸다. 물론 여성도 생물이고, 성적 욕망이 모든 생물의 본능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성욕이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절제가 불가능한 필수적인 욕망이라고 보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절제가 가능한 부차적인 욕망으로서의 성욕은 여성의 일상생활이나 인간관계 전체를 지배하지 않는다. 단지 여성의 삶에서 부수적인 여러 요소 중의 하나일 뿐이고, 지금처럼 민주주의의 위기나 반지성주의가 득세하는 세계적인 상황에서는 더 부차적인 위치일 수밖에 없다. 여성혐오적이며 약자혐오적이고, 사회의 부조나 돌봄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서도 너무 많이 증가했다. 몸이 달아오른다고 해서 아파트 경비나 청소 노동자, 폐지 수거하는 노인과 같은 주변 이웃을 비웃는 멍청이와 어울릴 수 있는가? 외롭다고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조차 여성부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언급하는 쓰레기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


그런 면에서 (교회)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조차도 여성은 타인을, 특히 남성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점은 아쉽다. 여성들에게 있다고 가정되는 이 욕망은 어디로 향하는가? 결국 같잖은 상대의 자기애나 자기 과시에 이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성욕마저 식어버릴 정도로 퇴화된 시민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훈훈하게 분칠 하는 쪽으로 악용되고 있지는 않은가? 적어도 여성을 과거의 성경험 따위로 품평할 수 없는 2020년대에,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면, 그 섹슈얼리티가 어떤 사회 풍조를 만나 어떻게 좌절되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종교기관 안이든, 밖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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