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소비자적인 인간의 한계

by 김남희


쟤가 요새 인기 많아? 한동훈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신인 연예인을 보는 어르신의 마음이 된다. 내 눈에는 별 매력이 없어 보이는데 다니는 곳마다 여러 사람을 몰고 다닌다. 얼마 전에 있었던 여당 전당대회에서 무려 63퍼센트의 득표율로 당 대표가 될 정도다.


한동훈 하면 생각나는 것은 특유의 날카로운 말투와 신경 쓴 옷차림이다. 날카로운 말투는 소위 인텔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말쑥한 차림은 그의 취향을 나타낸다. 한동훈에 대한 기사나 게시글에는 그의 방대한 취향에 대한 것이 많다. 사무실에 진열해 놓은 슬램덩크 피규어, 취미 삼아 연주한다는 플롯, 요새 잘 나가는 IAB Studio의 후드 티나 ‘1992’ 맨투맨, CITIZEN 빈티지 시계 같은 것들은 적당히 힙하면서 클래식하고, 50대 정치인들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확고한 취향을 보여준다. 자신의 호오를 잘 알고 관리해 온 느낌이랄까. 사실 정치색을 내려놓고 한동훈이라는 사람을 바라보면, 요즘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상대방의 추궁에 대해서 (말꼬리 잡기라는 비아냥을 들을지언정) 참기보다는 반격할 줄 알고, 고유한 취향으로 자신이 무엇을 향유할 줄 아는 인간임을 드러낸다. SNS를 도배하는 여행 사진이나 맛집 인증 따위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 아닌가. 어찌 보면 그런 소비 취향에 대한 욕망이, 한동훈을 일정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게 하는 요소가 아닌가 한다.


반대로 한동훈이 보여주는 소비자적인 인간상에 질려버린 사람들은, 그에게 냉소적으로 되기 쉽다. 앞서서 내 눈에 한동훈은 별 매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내가 싫어하는) 보수당 정치인이 여서도 있지만,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 소비자적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서다. 물론 개성 있는 좋은 취향이 나쁠 건 없지만 그 자체로는 어떤 힘이 없다. 좋은 취향이 타인에게 겉치장 이상의 평가를 받으려면, 취향이 어떤 신념을 갖는데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멋져 보이려면, 카타리나와 같은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신념으로 취향이 승화되어야 한다. 한동훈을 비롯한 소비자적인 인간에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세련되고 건강한 한동훈은 자신의 당 대표 공약인 ‘제3자 채상병 특검안’ 앞에서 이리저리 말 바꾸기를 한다. 젊은 장병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급하면 민주당이 안을 내면 되지 않냐”는 식의 말을 쏘아붙인다. 거기에는 세련됨도 빈티지도 인간미도 없고 그저 어떻게든 이기고 싶은 이기심만 발동한다. SNS에 널린 우리 시대의 멋쟁이들이 그저 자기들이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편견이나 혐오에 사과하지 않고 바득바득 우겨대는 꼴과 비슷하다. 한동훈은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동훈적 인간, 소비자로서의 자신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사람들의 밑천을 폭로한다는 점에서야, 비로소 가장 흥미로운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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