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좋아할 생각은 없었는데

‘올데이 프로젝트’ 입덕기

by 김남희

되짚어보면 나는 혼성 그룹에 약했다. 내 평생의 아이돌 동방신기를 좋아하기 전에 인생에서 가장 먼저 좋아한 가수는 자우림이었다. 또 자우림으로부터 시작된 혼성 밴드들에 한 번씩 마음을 주었던 시절. (물론 지금도 그들은 멋지고, 나는 그들의 노래를 사랑한다.) 그 뒤로는 KARD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집회에 가서 더 좋아하게 된 코요태의 노래. 그러니 더 블랙 레이블이 혼성 아이돌 그룹을 내겠다는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레이블의 수장은 테디 아닌가. ‘착한 얼굴의 그렇지 못한 태도’라는 명가사로 나를 울린 그 사람.


‘올데이 프로젝트’라는 이름에 오, 이름이 살짝 길군, 하다가, 23일 오후 6시에 데뷔 싱글을 내겠다는 공지에 후다닥 저녁을 먹고 1번 트랙이자 타이틀 “FAMOUS”를 들어봤다. 도입부를 담당한 애니의 근사한 저음의 랩에 마음을 빼앗겼다. 이 정도까지 저음인 여자 아이돌이 있었나. 노래에선 도입부의 가사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걸로 봐서 여기가 킬링 파트이자 훅이다. “분명 나쁜 아이는 아니어도 또 틀에 가두면 We break It.” “분명 나쁜 아이는 아니어도”의 말맛이 장난 아니다. 멤버들의 음색과 랩 스타일도. 하루 종일 중얼중얼 거렸다.

더블랙레이블에서 공개한 올데이 프로젝트의 단체사진. 왼쪽 위부터 우찬, 영서, 베일리, 애니, 타잔.


애니는 아이돌 판의 팬들이라면 거의 다 알고 있는 더 블랙 레이블의 ‘신세계 회장 손녀 연습생 걔’였다. 걸그룹에 합류하지 않아서 나간 줄 알았는데 결국 데뷔까지 했구나. 게다가 이 정도 랩이라니. 대단하다. 회사 오너의 가족으로 태어나 증여된 재산과 주식 수익 따위를 소비하며 살거나 혹은 계열사의 ‘낙하산’ 임원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구나.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시스템에 들어가서 그 규칙을 존중하면서. 사실 연예계는 만만한 곳이 아니다.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자식이라고 해서 드라마 주연을 꿰차거나 히트곡을 발표하진 않으니까. 어찌 보면 웬만한 데보다 훨씬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일단 데뷔까지 이뤄냈다는 사실에 대단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근데 역시 사람들의 생각은 각각이 달라서, 소속사가 데뷔 전에 올린 인터뷰 영상에서 “연진이 그룹 같다ㅋㅋㅋㅋㅋㅋㅋㅋ 손명오 닮은 애도 나오고.” 같은 댓글이나(이 댓글로 <더글로리>가 더 싫어졌다.) “신세계 손녀 데뷔에 서민통 오는 반응” 따위의 숏츠 영상이 적잖게 나온다. 이런 반응을 보면 프로포폴 투약이나 불법 승계를 저지르고 뇌물죄로 징역까지 살다 온 이재용이나, 이마트 노동자들의 휴식 시간도 없애버리고 ‘멸공’ 따위나 부르짖는 정용진에게도 이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의문이 든다. 자신들의 상상 말고는 실체가 없는 애니의 데뷔 특혜 ‘의혹’에 분노한다면(애니는 걸그룹 데뷔가 무산된 바 있다) 실체가 있는 재벌 남성 CEO들의 비위 ‘사실’에도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재드래곤 떡볶이 먹방’ 따위만 숏츠로 만들 게 아니라.


게다가 며칠 안 돼서 음원 차트 상위권에 진입한 이 그룹의 화제성, 자체 컨텐츠나 숏츠만 올려도 하루 좀 지나 백만 회에 근접하는 이들의 인기는 사람들의 삐뚤어진 찬사를 불러오기도 한다. “다른 그룹과는 다른 실력”(얘네가 대단한 실력인 게 다른 그룹이랑 비교해야 알 수 있나?), “이지리스닝으로 지쳐가던 케이팝 판의 한줄기 빛”(이지리스닝이 죄도 아니고), “전원 성인 전원 한국인 요즘엔 이게 귀하다”(얘네가 한국인이 아니었으면 ‘다 좋은데 한국인이 아니어서 아쉽네’ 이럴건가?) 따위의 말들. 올데이프로젝트 컨텐츠 댓글만 봐도 한국 사회와 아이돌 판의 문제점을 거의 다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애호에도 타인과의 비교(와 깎아내림)가 필수적인 한국 사회의 팍팍함이란. ‘걔보단 네가 훨씬 낫다’가 뭐 대단한 칭찬인 줄 아는 사람들의 얄팍함이란. (물론 외국어로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있다.)


막상 이들의 영상을 보면 부드러운 페어 안무와, 각 멤버들의 멋진 솔로 안무, 파워풀한 단체 군무, 각자의 매력적인 음색으로 다채롭고 신선하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데 말이다. 또 여자 멤버들과도 친근하게 말을 주고 받고 개그를 치는 타잔, 말을 하고 싶으면 손을 드는 귀여운 우찬, 멤버들을 챙기고 글로벌 팬들에게 영어로 감사를 표현하는 애니, 토크 흐름을 정리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아이돌력 만렙’의 영서,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와 다르게 다정한 베일리가 보이는 인스타 라이브와 자체 컨텐츠들은 훈훈함을 자아낸다. 남자 아이돌 그룹, 여자 아이돌 그룹의 끈끈한 친밀감도 너무 좋고 귀엽지만, 이들의 살짝 결이 다른 배려와 조심스러움이 있는 친교도 그대로 너무 좋다는 느낌이 든다. 남성과 여성이란 두서없이 혐오하고 싸우거나 아니면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식의 유치한 연애 일변도로 흐르기 마련인 한국 사회에서 남자 멤버들과 여자 멤버들이 사이좋게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관심 속에 보여질 수 있다는 게 너무 멋지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생각은 없었지만, 앞으로도 이들의 태도와 결과를 계속 지켜보고 즐거워하고 영향받을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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