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에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읽으며 생각한다

by 김남희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다시 읽는다. 처음『강의』를 읽었을 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때는 2008년이어서 그 책은 초판 19쇄를 찍었고, 중학교 3학년 권장도서로 선정되었다. 서책이 그려진 그윽한 동양화 표지에 선생의 글씨체로 ‘강의’라는 제목이 쓰여져 있는 걸 보고 있으면 나 자신이 어른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라는 부제라니. 입시에 돌입하면서 ‘독해’라는 단어밖에 못 들었던 학생에게는 더욱이 그 말이 멋스럽게 들렸다. 표지를 펼치고 내용을 읽어내려가다보니 더 깊은 세상이 그 안에 있었다. ‘근대 담론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계론’이라는 관점에서 오늘날에 동양고전이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는지 살펴보자는 주제 의식이 내가 여태껏 본 책들 중에서도 가장 거대했고, 한 줄 한 줄 문장 안에 담긴 밀도가 대단했다. A는 A고, B는 B였던 세상에서 A는 A지마는 그 너머의 C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라고 현대의 관점이 제시될 때의 그 충격이란.


신영복 선생님 강의 사진.jpg 신영복 선생의『강의』. 중학교 3학년 때 직접 구입했기 때문에, '30604', 즉 3학년 6반 4번의 것이라는 견출지가 붙어있다.


다시『강의』를 읽으면서도 책이 주는 촘촘한 밀도의 사유와 새로운 문제의식에 꽤나 놀라게 된다. 지금 나는 4장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를 읽고 있는데, 거기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먼저 실린 인용문을 다시 읽어보노라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기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나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논어』의「자로」편에서 공자가 자공에게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 같지 못하다”고 이르는 대목을 해설하면서 인용한 이 단락은 요즘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기세와 박력이 인상적이다. 자기들은 타인에게 함부로 미움을 휘두르는 주제에, 정작 스스로는 미움받는 게 무서워서 ‘증오’라는 말도 쓰기 두려워하는, 그저 다정한 말만 주워 섬기는 찌질한 이 시대여. 공자의 말과 신영복의 해설은 미움받을 용기와 각오를 갖춘, 어떤 조잡한 기준이 아니라 불의와 의로서 판단받겠다는, 그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개인적인 호오를 의식하는 일을 내려놓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또는 그 기준에 따라 타인도 바라보겠다는 단호한 태도. 그 태도의 곧음과 일관성만으로도 신뢰를 보내고 싶어지는 의지 말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 세계 안에서도 그 말은 옳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정의에 대한 사랑은 내란 정국에 대한 증오에 다름 없지 않은가? 내란 정국을 철저하게 미워하는 것이야말로 정의 사회 구현에 대한 사랑이 된다. 사람들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세워 죄인도 사랑하고 죄도 사랑하는 병에 걸렸다. 내란수괴의 불법 비상계엄이 정당했다고 믿는 일부 청년 남성들의 폭력 사태에서 죄와 죄인을 분리한답시고 결국 그 청년 남성들의 박탈감과 혐오, 폭력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들을 다독여주자는 식으로 흐르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런 폭력성을 일반적인 인간 사회의 특성으로 보고 고치려기보다는 수용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도 나온다. 물론 나는 폭동을 저지른 일부 청년 남성을 영원히 낙인찍어 사회에서 격리하자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악의 평범성’에 발을 담그게 된 범속한 인물들일 뿐이며 악마의 현신도 아니기에 죄의 댓가를 치르고 적절한 교화를 거쳐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른 시민들이 그들을 괴물이자 악마로 낙인찍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써 무조건적인 이해나 용서, 격려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방법들은 틀렸다. 그 방법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반성할 수 없게 한다. 그 방법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없게 한다.


따뜻한 척, 다정한 척은 집어치우고 앞을 직시해야 한다. 신영복 선생의 말처럼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는 증오의 현장을 바라봐야 한다. 선진국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지독한 양극화와 불평등이 불법 비상계엄으로 더 심화된 한국 사회의 현실. ‘친절한 한국인’을 가장하지만 국적과 계급과 성별과 나이에 따라, 직업과 출신 지역과 장애 여부에 따라 타인을 차별하고 모욕하는 한국 국민들의 현실. 시민 행동으로 불법 계엄을 끝장냈지만 그마저도 한국인의 무오류성을 선전하는 신화로 만들려는 역겨운 한국 사회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혈통주의 같은 것들. 우리가 서 있는 자리와 우리가 서 있다고 말하는 자리의 차이가 이토록 큰 적은 없었다. 한동안은 말을 팔아먹으며 정신승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차별과 혐오, 불평등이 넘쳐난다면 말이 그저 구호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불의와 불평등을 증오하자.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에.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비상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