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중요한 일이나 하다못해 사랑한다는 고백도, 이별을 고하는 슬픔조차 간단하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허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같은 반에 있는 친구에게 자주 손 편지를 써서 보내곤 했다. 성적표도 우편으로 받았던 시절이기에, 눈에 띄는 빨간색의 늠름한 우체통이 마치 동네를 지키는 장군처럼 곳곳에 서 있었다.
귀하디 귀한 엽서가한 귀퉁이라도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빨간 우체통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날 이후 학교와 학원에 있는 시간 외에는 전화기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걸려 오는 모든 전화는 내 손을 거쳤다. 그 어떤 기다림도 이렇게 떨리고 매 날이 긴장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발표를 기다리는 며칠이 억겁의 시간처럼 흘렀다.
이럴 때 발동되라고 장착된 사람의 오감이 아니겠지만, 온몸의 세포가 솟아오르던 그날 그 벨 소리
‘따르릉’ 아름다웠다.
반복적인 통화에 적어 놓은 글을 읽어대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기계처럼 들렸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중요한 단어들은 깨알같이 다 알아들었다. 예비 소집 일까지 정확하게 전달받고 나서 집어던지듯 수화기를 내려놓고 질러대는 소리에 시끄럽다는 엄마의 잔소리는 멜로디였다.
진주시에서 당당하게 20등 안에 든 이들의 짝까지 총 40명이 어느 작은 사무실에 모였다.
경쟁률이 저조했던 건지,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치밀한 노력으로 머리를 굴렸는지 우리 반에서만 6명이 뽑혔다. 그중 2명은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가지 못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2000명, 진주에서 40명, 그중 우리 반에서 4명, 그 안에 지금까지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여전한 우리 셋이 들었다는 건, 우주를 한 바퀴 반쯤 돌아 다시 만나는 인연쯤으로 정리해 두자.
이런저런 규칙들과 우리를 인솔할 책임자들의 소개가 끝나고, 일정에 관한 설명을 듣고 서로의 통성명을 간단히 하는 과정에서 어느 책임자 한 분이 내 이름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안 뽑아주면 남강 다리에서 빠져 죽겠다는 애가 너구나?”
읽어주길 바라면서도 설마 읽겠나 싶었던, 깨알만 한 빽빽한 엽서 테두리 글까지 다 읽은 남자분이 웃으며 말했다.
“진짜 빠져 죽을까 봐 뽑았다.”
졸지에 그분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 되어버렸다.
안 뽑힌다고 정말 죽기야 했겠느냐마는, 죽을 만큼 억울해서 남강 다리 위를 서성거렸을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역경과 고난이 펼쳐질 '1994년 별이 빛나는 밤에(용평스키장)' 관광버스에 합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