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나, 그리고 그 여자.
그때 정동진 파도의 인심.
더위가 가시지 않은 구월의 언제였던가, 볼을 쓸고 가는 바닷바람은 칼바람을 흉내라도 내는지 스산하게 내 볼을 쓸고 갔다.
정지된 화면처럼 바다를 보고 서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슬프다 못해 너무나도 처량했다. 철썩거리는 파도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더욱더 구슬프게 바위를 쳐댔다. 바위도 온몸으로 파도의 마음을 받아내고 있다. 파도의 하얀 눈물에 바위는 마를 날이 없다. 자신의 아픔을 받아내는 그녀의 몸도 슬픔에 온전할 날이 없다.
언제나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멈춰서 돌아볼 땐 늦었고, 후회는 지금 눈앞에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녀는 자신과 닮은 파도를 아련한 눈빛으로 담아내고만 있다.
바닷바람을 배경 삼아, 파도 소리를 음악으로 깔고 탁 트인 방파제에 달랑 소주 한 병과 잔 하나씩을 들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고 서로가 아무 말이 없다. 짜디짠 바닷바람을 안주 삼아 마시는 소주에, 속이 쓰리지 않은 이유는 그녀도 나도 알고 있다. 그 눈빛에 그려진 그녀의 걱정을 다 이해하진 못하지만, 털어버릴 수 있는 무게감이라는 걸 말해주려다 다시 소주로 내 입을 막는다.
너무 많은 말들은 오히려 더 많은 근심을 만들고, 마음만 무겁게 한다는 걸 알기에.
“아가씨들 여서 뭐 하노?”
누군가 말을 걸어온다. 지은 죄도 없는데 놀란 그녀와 내가 화들짝 소주잔을 숨긴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퍼지고 앉아 소주를 마시는 여자들이 안쓰러운지, 방파제 한쪽에 마련된 자리로 안내하더니 간단한 과일을 내어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친절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탐스럽게 내어오는 과일을 보자 달게 넘어갔던 소주가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쓰게 올라온다. 주고받는 불안한 눈빛과 달리, 입은 친절하게 내미는 인심에 마른침을 삼킨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겁 없이 덥석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근처에서 카페를 한다는 인상이 험악한 남자는, 우리가 재미 삼아 잡았던 고동까지 삶아서 가져다주었다. 정동진의 인심이 좋은 건지, 바닷바람에 홀렸는지, 파도 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도 아니면 남자의 사람 홀리는 기술이 좋은 건지,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정동진의 깊은 바닷속으로 정신 줄을 던져버렸다.
잠시 후, 남자의 친구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온몸이 딱 달라붙는 검은 의상은 스킨스쿠버 다이빙 옷이란다. 비장하게 나타난 친구는 우리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생뚱맞게 멋있는 척 바다로 뛰어들었다. 문어, 성게, 쥐포,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을 잡아 다시 새로운 안주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믿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은 자신들의 영웅담을 이야기하지만, 그녀와 난 싱싱한 안주에 쉴 새 없이 들어가는 술이 한쪽으로 치우친 감정을 씻어주어 신날 뿐이다.
그때 다시 등장한 한 여자.
풀어헤친 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눈앞에 들어왔다. 혼자 바다를 찾은 저 여자도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 여자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불렀다. 마치 우리가 이 자리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당당하게 같이 한잔하자고. 그 여자의 아픔의 크기도 지금의 낯선 분위기보다 큰지 서슴없이 합석했다. 추억이 담긴 장소를 이제 홀로 찾았다는 그 여자.
그렇게 만나 나누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넓은 바다 앞에선 인간의 하찮은 삶에서 오는 작은 일이었다. 분위기가 각자의 감정 어딘가에서 공감을 하는지 서로가 비워내는 술잔에, 쌓이는 병 숫자가 세 여자가 함께한 세월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일렁거리는 물결 위로 노을이 내려앉은 풍경을 바라보는 세 여자의 눈동자는 너무나 선명했다. 정신은 더 또렷해서 낯선 두 남자의 어떤 말에도 넘어가지 않는다. 영화 속 주인공 그 여자는 다음날 출근을 위해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우린 쿨하게 다음을 약속하지 않고 보내줬다. 그녀와 난 하루를 더 묵기로 하고 붉은 노을이 검게 변하기 전, 낯선 남자들이 다정하게 다가오기 전, 돈으로 계산하려 하지 않는 인심을 고맙게 잘 먹었다는 진심으로 전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그녀와 난 일출을 보기 위해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녘에 눈을 떴다.
전날 일렁거리는 물결 위로 내려앉은 노을이 퐁당 빠졌다가 다시 튀어 오르듯 떠오르는 해를 보며, 어제의 경솔했던 행동을 반성했다. 위험했던 짓이라고. 그리고 그 눈부심에 마음속 이런저런 것들을 소독했다. 깨끗하게 씻게 가라고. 영화 속 주인공인 그 여자도 이제 해피엔딩을 맞이하라는 마음도 살짝 얹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서의 추억을 둥근 해 속에 가두고 돌아섰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녀와 난 다시 그곳을 찾았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우리가 마지막 밤을 묵었던 숙소 앞엔 더 크고 멋진 유람선이 나타나 가로막고 있었다. 촌스럽게 둥근 모양으로 덩그러니 있던 그 카페도 사라지고 세련되고 예쁜 카페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이제 늙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낯선 남자는 없었다. 긴 머리를 흩날리며 홀로 바닷가를 찾은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바위가 들썩이는 파도의 마음을 여전히 받아주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