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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l 07. 2023

내가 돌아본 곳에.

서로를 위한 우리들의 배려


‘보고 싶어~’

‘나도~’ ‘난, 보고 싶어 눈에 진물 났어ㅎㅎ’

 

‘술 마시고 싶어.’

‘콜!’ ‘어디로 갈까?’

 

언제나 우리 셋의 만남은 즉흥적이지만, 거절 따윈 없다.

오늘은 새로 이사한 친구의 집으로 장소를 정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초, 안산에서 전학 온 친구는 가무잡잡한 예쁜 얼굴을 장착한 새침한 도시 아이였다. 그러나 이제 진주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어, 쏟아내는 말들이 토박이인 다른 친구와 나보다 구수하고, 처음 듣는 사투리도 더 잘 구사한다.

딸과 둘이 살면서 눈만 마주치면 걱정스럽게 건네는 말들이 부딪혀, 상처를 주는 것이 서로에게 독으로 번져 과감하게 독립시켰다. 그러자 안 하던 간지러운 말을 하는 살가워진 딸의 모습에 가족은 떨어져야 한다는 진리를 터득함과,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면서 살 비비고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챙기게 된다는 참 알다가도 모를 모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쨌든 시간은 여유롭고 마음은 더 자유로운, 제2의 홀로서기 삶이 좋단다.

 

다시 홀로 선 기념으로 1인 화로를 샀다며 소고기를 구워준다는 친구의 대접을 받기로 하고, 작은 공간 구경에 나섰다. 깔끔하고 야무진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 친구의 공간은 오밀조밀 예쁘게도 꾸며 놓았다. 형편상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취하던 친구였다. 그간 변화해 온 친구의 공간들을 알기에, 지금 여기 친구의 안식처가 아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오묘한 감정이 밀려든다.

 

그러다 발견한 작은 상자 하나.


“이거 열어봐도 돼?”


허락받고 열어 본 상자 안에는 우리의 그때 그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네모난 작은 종이에 남겨진 정지된 우리들의 모습에 숨이 넘어가게 웃어대기 시작한다.

 

새로 이사 간 학교 교실에서 기념으로 온갖 포즈를 잡고 신난 모습, 축제 때 연극 공연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한 모습, 소풍 가서 총각 선생님 팔짱을 서로 끼겠다며 까르르 거리는 순박한 웃음소리가 종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너의 첫아이 돌잔치에서 어른이 되어 한껏 멋을 부린 촌스럽기 그지없는 모습.


결혼식 드레스를 입은 네 옆에 난 보이지 않는, 나만 씁쓸한 손바닥만 한 종이들을 보며, 순간순간 다 기억이 나는 그때의 이야기들을 하며 웃는 눈가에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가물거리는 그날에 대한 기억들인지 모를 그 시간이 맺힌다.

 

분명 순간을 담고 있는 작은 종이에 우리는 지금보다 젊음을 간직해야 하는데, 모두 세월을 거꾸로 달리고 있다며 다시 웃기 시작한다.

 

삶에 찌들었던 그때가 고스란히 담겨 정지된 그 표정들은 10년이 젊은 나이지만, 그 미소는 지금 웃다 울다 망가진 얼굴보다 더 찌들어 있다. 앞으로 10년 뒤에 또다시 이런 날이 오면, 그땐 지금의 젊음과 행복을 떠올리며 웃기만 하자고 홀로 마음속에 새겨본다.

 

친구가 1인용 화로에 맛있게 구워주는 소고기에 곁들인 술이 달큼하고 알딸딸하다.

 

공연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함께 관람 일정을 맞추고,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의 계획에 맞춰 서로의 날짜를 조율하고, 여러 달을 고민하던 쌍꺼풀 수술을 이제야 하겠다는 또 한 친구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진주 최고의 성형외과를 같이 검색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린 언제나 누가 무언가를 하자고 하면 좋다.

 

살아온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 해 왔지만, 만남의 날들은 또 그리 길지 못했다. 연락이 없으면 이유가 있겠지, 하고 기다린다. 왜 연락을 하지 않았나, 섭섭하지 않다. 그러다가도 몇 주 몇 달 혹은, 일 년 뒤라도 얼굴 보자 하면 달려간다.


나조차도 우리의 이런 관계가 신기해서 가끔 생각했다. 우리의 관계성에 대해. 하지만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좋고 편한데 이유는 없었다.

 

내가 손을 뻗었을 때 거기 너, 그리고 네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돌아봤을 때 거기 항상 너희가 있었다.

 

서로의 힘듦을 이야기하지만, 그 무게감은 떠넘기지 않았고, 서로의 아픔은 달래주지만, 그 눈물까지 나누려 하지 않는 배려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고,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기에, 무심한 듯 건네는 눈빛, 말 한마디, 의미 없이 던지는 문자 한 통까지, 가슴속에 담는다.

 

술기운이 오른 친구가 평소에는 잘하지 않는, 문자로 낯간지러운 애교를 부린다.


‘사랑해 내 꿈 꿔~’


내가 얼른 답을 보낸다.


‘그건 힘들 것 같아. 아직 내 배우 조승우도 내 꿈에 등장 안 했는데 네가 먼저 나오는 건 결혼 안 한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봐. 오늘 승우가 내 꿈에 나오길 니들이 기도 좀 해.’


나의 쓸데없는 소리에 답은 없다. 읽씹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도 한동안 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각자의 시간을 열심히 보낸 후 톡 방의 알람이 뜨겠지.

 

‘성형외과 상담은 언제 받으러 갈 거야?’


그럼, 우리의 계획했지만, 정하지 않았던 만남이 성사될 것이다.


아이가 셋인 친구는 예쁘게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는 미간 보톡스 재시술받고, 홀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친구의 팔자 주름 보톡스 시술까지 야무지게 이루어지면, 각자의 얼굴엔 한층 더 젊음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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