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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l 01. 2023

돌아오는 계절

여자, 남자 그리고 여인.

벌써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던가. 돌아오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여자는 그날, 그 시간 그곳에 서 있다.



황망하게 떠난 부군의 영정 앞에 지쳐 보이는 여인이 위태롭게 서있다. 엄마의 치맛자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어 잡고 있는 사내아이는 지금, 이 상황을 알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는 여자. 아무 말 없이 그런 여자를 바라만 보는 여인. 그들 사이로 흐르는 공기는 무겁다.


한번 보고 싶었다. 먼저 말을 건네는 여인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러나 여전히 마주하는 대답은 없다.


그때, 사진 속 남자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아이의 하얀 손을 쓰다듬는 저 여인의 자리에 미안함에 차마 울지도 못하는 여자가 서 있었을까.




“나랑 결혼해요!”


남자는 여자에게 어디 밥 먹으러 가자는 듯이 툭 던졌다.


“싫어!”


여자 역시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남자와 여자에게 이런 대화는 정말 별스럽지 않은 대화였다. 밥을 먹다가도, 커피를 마시다가도, 심지어는 헤어질 때도, 아무렇지 않게 농담으로 내뱉는 말처럼 오가지만 남자도 여자도 진심이었다.


3대 독자로 귀하게 자란 남자는 늘 결혼을 꿈꿨다. 가정을 이루어야 모든 것이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시부모님을 모시며 고생하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앞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프러포즈를 거절하는 여자가 혹여 고생이라도 할까 조심스럽지만, 가부장적이고 고지식한 아버지와는 달리 사랑하는 아내를 잘 도와 모든 걸 같이 극복하고 해결해 갈 자신이 있었다.


남자는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친구 같은 아들, 애인 같은 딸을 낳아 자신이 꿈꾸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반면, 여자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이란 여자에게 구속이었다.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한 채, 남편과 아이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에 영 흥미가 없었다. 주위에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 혼자일 때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를 더 많이 봐왔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그저 자장이냐 짬뽕이냐 정도의 선택에 불과한 일이었다. 자장을 골라도 그만 짬뽕을 골라도 그만이지만, 여자는 짬뽕을 더 좋아했고 어쩌다 호기심에 자장면을 고르면 후회하곤 했다.


그렇게 여자에게 결혼이란 손이 가지 않는 자장면이었다.


“결혼 안 해주면 나, 선봐서 결혼할 거예요.”


한 살 아래인 남자는 항상 여자에게 존댓말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팔 개월이 빠른 여자는 늘 편하게 말을 했다.


“정말 선이라도 봐서 간다니까요.”


망설임 없이 그러라고 말하는 여자에게 내심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난 남자의 목소리에 심술이 묻어났다.


이제 26살의 나이에 선을 봐서 결혼한다니 조금 황당했지만, 그 말에 현혹이 되어 남자의 선을 말리자니 여자는 자존심이 상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이제 겨우 27살에 결혼이라니, 그것도 손위 시누가 네 명이나 되는 남자의 집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적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어른스러웠던 남자는,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신도시에 빌라 한 칸을 분양받았다. 자신의 성실함에 빚을 얹긴 했지만, 세를 주어 꼬박꼬박 받는 월세로 작지만 자신의 결혼 자금으로 저축까지 하고 있었다.


착실함으로 보자면 존경심마저 들었다. 간혹 그가 보이는 매너는 또 어떤가. 항상 여자가 먼저 들어설 수 있게 문을 열어주고, 어딜 가든 편하게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당겨 주고 밀어주었다.


처음엔 뭐 하는 짓이냐며 어색했던 여자도 점점 그런 남자의 자상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뿐인가, 뭐든 여자에게 물어보고 조금이라도 싫다는 것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될 수는 없었다.


남자는 만남의 종착역이 결혼이라 생각하고 같이하길 원했지만, 여자는 그냥 지금처럼 좋아서 가진 만남을 결혼으로 결론지을 수 없었다.


생각의 차이는 서로를 좁히지 못했다. 여자는 한 발 앞서 가버렸고, 따라오던 남자는 자꾸만 멀어져 가는 여자에게 전처럼 다가가지 못했다.


어느 순간 다가온 여자와 남자의 이별은 자연스러웠다.



 

남자가 곁에 없던 겨울이 유난히 춥게 느껴졌던 여자. 여자가 없던 봄의 새싹이 힘없어 보였던 남자.


서로가 두 계절을 따로 보내고 뜨거워지던 여름날, 이제는 낯설어 버린 남자의 목소리가 귀 너머로 들려왔다.


정말 착한 여인을 만났다고, 어쩌면 그 착한 여인과 결혼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여자는 진심을 담아 축하해 주었다.


“기다리라고 하면 난 기다리고 싶은데…,”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으로 건네는 남자의 반말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었다. 술이 올라 떨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흔들려서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곁에 두고 옛 인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실망이었다.


여자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던 가을은 늘 그렇듯 낙엽을 흩날렸고,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지나, 새로운 희망이 돋아나던 어느 봄날, 남자는 착하다는 그 여인과 결혼했다.


그렇게 여자와 남자가 이제는 정말 서로의 기억이 겹치지 않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몇 번인지 모를 계절을 흘려보내고, 다시 찾아온 여름의 끝자락.


기억 속 어딘가에 가둬 두었던  목소리. 눈앞에 보이는 책장의 책 제목을, 세 권 정도 읽는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고 느렸다. 안부를 물어오는 남자에게 여자는 잘 지낸다고 퉁명스럽게 답했다.


결혼했냐는 남자의 질문에, 여자는 당연히 안 했다고 답해주었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착한 여인은 어디 두고, 성질 더러운 여자를 보고 싶어 하냐며 핀잔을 주고 또다시 걸려온 남자의 전화를 여자는 끊어버렸다.


희미해진 지난날 안겨 주었던 실망감과 다르지 않은 허무함 던진 남자의 행동은, 여자에게 있어 그 시절 좋았던 추억마저 망가트려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결혼한 남자가 지나간 옛 인연을 찾는 것을 여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이유 중, 어디쯤 속해 있는 행동을 하는 남자를 여자는 더는 마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여자의 실수였을까, 아님.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린 남자의 마지막 실언이었을까.


남자의 착한 아내였던 여인이 어떤 맘으로 보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문자 한 통은, 여자의 마음속으로 무섭게 휘몰아치며, 절벽으로 밀어버렸다.



 

그렇게 마주 선 여자와 남자의 아내였던 여인.


여자는 여전히 무엇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던 가녀린 여인이 이번에도 먼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오해하진 마세요. 그쪽 연락처를 알아낸 건 나예요.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그 말에 여자는 마음속 어딘가 보이지 않게 묶어 놓았던 사슬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누르고 있던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던 남자의 아들은, 아빠가 잠시 먼 곳으로 떠났다고만 아는지, 맑은 눈을 반짝이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여자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만 있다.


여자의 젖은 눈이 남자와 닮은 아이의 눈과 마주쳤지만, 앞이 흐려져 아이의 코와 입은 그릴 수가 없다.


얼마나 울었는지 알 수 없는 퉁퉁 부은 눈을 한 남자의 친구가 여자를 알아보고 다가온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고 있는 여자를 말없이 안아 준다.




행복하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픔은, 남자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고, 마지막 길에 마주한 남자가 여자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고, 착하기만 한 여인이 먼저 연락하라고 다른 이를 통해 바뀐 여자의 번호를 알아봐 주었다고 한다.


그저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남자를, 여자는 야박하게 밀어냈고, 차마 자신의 죽음을 알릴 수 없었던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노라 했었다는 친구의 말에. 여자는 다시 주저앉았다.

 



“가을이 왜 좋아요?”


남자가 여자에게 묻었다.


“첫사랑 오빠가 생각나거든, 진짜 멋있는 오빠였는데, 지금은 잘살고 있으려나?”


여자의 말에 남자의 표정은 금방 질투로 변했다. 그걸 재밌어하는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멋졌던 첫사랑 이야길 간혹 하면 남자의 질투를 즐겼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언젠가는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겠노라, 확신에 찬 다짐을 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자의 그 모습이 좋아 여자가 웃었다.




기억을 건너 여러 번의 계절을 돌아, 바람에 떨리는 잎들이 유난히 아파 보이던 그해 가을, 여자가 울고 있다.


이별이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언젠가 모든 것이 기억 속에 자연스럽게 담기길 바라며, 어김없이 돌아오는 계절, 여자는 남자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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