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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삭제 Jul 07. 2023

넋두리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


‘스륵스륵, 타닥타닥, 쓰으윽, 쏴아아.’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소리에 가만히 누워있는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살짝 도는 한기에 얇은 봄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스르륵 눈을 감는다. 이불과 몸이 만들어 내는 열기에 따뜻해진 기분이 꼼지락거리는 발끝으로 전해진다. 이런 날은 푹신한 침대 위보다는 따끈한 방바닥에 살을 착 달라붙게 누워 있는 기분이 더 짜릿하다.

그리고…,

정구지(‘부추’의 방언)를 쓱쓱 무심하게 썰어 넣고, 홍합은 적당한 식감을 유지하는 크기로 다지고, 땡초(청양고추)는 무리해서 많이 총총 가위로 막 자른다. 양파도 얇게 채 썰고,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일대일의 비율로 넣고 잘 버무린다. 바다를 품은 홍합의 짠맛이 있기에 간은 너무 강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다. 과하게 많이 들어간 땡초의 매콤함이 게미(‘음식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맛’의 전라도 방언)를 내기도 한다. 정 싱거우면 식초와 고춧가루를 살짝 곁들인 간장을 찍어 먹으면 그만이다.

프라이팬에 기름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둘러야 한다. 모름지기 찌짐(‘부침개’의 경상도 사투리)은 구워내는 것이 아니라 튀겨야 하는 것이다. 반죽을 살살 최대한 얇게 펴서 올려둔다.


찌짐이 두껍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 쌓이는 뱃살의 두께만큼 멋이 없다. 그러나 나이 들어 멋있기가 어렵듯이 얇은 찌짐은 내겐 너무나도 어렵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이가 든 나도, 조금 두꺼운 찌짐도 그럴싸하면 그만이지.


중불에 가장자리가 노릇노릇 바싹하게 튀겨지면 납작한 소쿠리에 담아낸다. 급한 마음에 나간 손이 뜨거운 줄 모르고 찌짐의 귀퉁이를 잽싸게 뜯어 빛의 속도로 입안에 던진다. 음, 간이 ‘딱!’이구나. 뭐든 하나면 정이 없으니 지글거리는 기름에 정성 들여 반죽을 한 번 더 펼친다.


미리 삶아둔 고구마와 얼마 전, 엄마의 맛깔나는 솜씨로 담아둔 열무김치가 먹기 좋게 적당히 익어 침샘을 자극한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요 세 가지만 쟁반에 담아 따끈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눕는다. 그리고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이미라, 신일숙, 황미나,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밀까.





아차, 만화책을 먼저 집어 들기 전, 프라이팬 올려 두었던 찌짐을 한 번 뒤집고 와야 한다. 적당히 누런색을 넘어 타 버리면 곤란하다. 귀신같은 타이밍에 맞춰 프라이팬을 앞뒤로 반동을 주어, 하나, 둘, 셋, 기합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 집중을 하고 찌짐을 공중 부양 시켜 다시 프라이팬 안으로 안정적으로 착지시킨다. 성공의 세리머니로 절로 터져 나오는 콧노래에 장단을 맞춰 흥분된 몸의 동작을 굳이 춤이라 부르진 않겠다.


다시 후다닥 방으로 뛰어가 배를 깔고 누워 적당히 식어 딱 먹기 좋은 찌짐을 젓가락으로 쫙쫙 찢어서 입 안 가득 머금는다. 입 속으로 퍼지는 정구지의 푸름은 산뜻하고, 심심하지 말라고 터지는 바다 향을 품은 홍합의 조합은 언제나 옳다. 거기에 입천장과 혓바닥을 때리는 땡초는 매콤함을 넘어 아림으로 입 안에 불을 낸다. 하지만 걱정 마라 그 불은 달짝지근한 고구마로 진압하면 백발백중 잡힌다.

누워서 음식을 먹다 목이 막히면 발딱 일어나 새콤한 열무김치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키면 쑥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누워서 만화책 삼매경에 빠져들면 행복함은 계속된다.

황미나의 ‘웍더걸 덕더걸’은 언제 봐도 배꼽을 잡는다. 이런, 정신없이 웃느라고 기술적으로 뒤집어 놓은 찌짐 뒤편을 살짝 태우고 말았다. 그래도 괜찮다 꼬실거리게 탄 것도 나름 깊은 맛이 우러난다. 더 바싹하고 살짝 느껴지는 탄 맛도 오늘 같은 날이면 나쁘지 않다.

신일숙 ‘리니지’의 방대한 서사에 감탄하며, 이미라의 ‘인어공주를 위하여’를 보며 또 눈물을 찔끔거린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창밖에 빗소리는 여전히 분주하고, 바닥을 치는 박자감은 시원한 음악 소리 같다. 기분은 좋아 마음은 평화롭고, 미각이 춤을 추는 입안은 축제 분위기고, 눈은 예쁜 그림에 빠져 별이 반짝반짝 떠 있다.

뜨끈한 방바닥의 열기와 찌짐과 고구마로 불러온 배에 스르륵 눈이 감긴다.

빗소리가 이젠 자장가로 변한다.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은 날…,

예전처럼 만화책을 빌릴 곳도 없고, 찌짐은 고사하고 비 내리는 밖을 보면 열일 중, 행동으로 하지 못하는 일탈을 글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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