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멀리 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단체 줄넘기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체교과 학생들은 아닌 거 같고 학교에 줄넘기 동아리가 있나 생각하니 그것도 아니다. 쉬지 않고 숨넘어갈 듯 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취미모임은 아닌 듯했다. 하교하는 며칠 보는 내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교문을 나가는데 우연히 줄넘기팀이랑 동선이 겹쳤다. 걸어가는 동안 의도치 않게 대화 내용을 듣게 되었다. 궁금하던 찰나 귀가 쫑긋해졌다.
“조교님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카프리제로 오세요. 메뉴는 가서 각자 시키시면 됩니다”
조교? 메뉴를 시키라고? 내 궁금증은 더 미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데 아는 친구가 눈에 띄었다. 방금 줄넘기를 하고 온 행색이다.
이때다 싶어 나는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운동하고 오는 거?”
“응! 요즘 줄넘기 하거든”
“같이 하는 사람들은 누구야?”
“체교과 조교님이 석사 준비하는데 학생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같이 하고 있는 거야”
내용인즉슨, 체교과 조교님이 줄넘기를 주제로 석사논문 준비를 하고 있는데 실험에 필요한 학생들을 모집해서 같이 정해진 시간에 줄넘기를 한다는 것이다. 줄넘기를 하는 날은 조교님이 학생들을 식당으로 데려가서 식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마침 끝나고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아까 들었던 대화내용이 이제 퍼즐처럼 맞춰졌다. 운동도 하고 끼니도 해결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아 부럽다”
“하고 싶으면 하면 돼~”
“정말?”
“그런데 힘들어. 그리고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 돼”
“나 줄넘기 진짜 좋아해. 나도 같이 할 수 있어?”
사실 줄넘기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지만 공짜밥을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순간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나와 버렸다. 친구가 조교님께 바로 나를 소개해 주시더니 내일 과사에 잠깐 들르라고 하신다. ‘오~ 나에게 이런 행운이!’ 너무 신이 났다.
다음날 키 몸무게를 재고 간단한 신상과 신청서 작성 후 앞으로 참여계획을 설명해 주시는데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두 달 동안의 일정이라고 한다.
드디어 줄넘기 참가 첫날.
가벼운 마음으로 운동복을 챙겨 입고 줄넘기와 물만 챙겨 바로 운동장으로 집합했다. 참여하고 있던 학생들은 이미 각자 자리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조교님이 오시더니 바로 외치신다.
“워밍업 100개 시작합니다!”
워밍업으로 100개라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들 줄넘기를 시작하는데 뛰는 자세가 선수들 같다. 중학교 이후로 처음 해보는 줄넘기라 약간의 적응시간이 지나고 몇 번 줄에 걸리더니 무리 없이 줄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열 번이 넘어갈 때쯤 벌써 숨이 차다.
순간 친구가 힘들 거라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만만치 않겠구나. 역시 세상에 공짜밥은 없구나’
숨이 턱턱 막히고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를 않는다. 겨우겨우 워밍업이 끝나는데 다른 학생들은 이제 몸이 풀린 듯 다들 가뿐한 표정이다.
바로 조교님이 외치신다.
“1회기. 1000개 시작합니다. 시작!”
‘오 마이 갓! 내가 잘못 들었나...’ 100개도 숨이 넘어갈 지경인데 1000개라니. 뭔가 잘못됐다. 일단 따라서 시작은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공짜밥에 눈이 멀어 흘려들었던 말들이 하나하나 되뇌기 시작했다. ‘그래서 끝까지 해야 한다는 말을 한 거였구나.’
큰일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범벅에 심장이 터질 거 같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다. 다른 친구들이 거의 마무리가 돼 가고 있는 사이 반도 못하고 있는데 조교님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태한 모습을 보이다가는 나를 탈락시킬 수 있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생사를 가르는 테스트도 아니고 못하면 그만인데 끝까지 해내야겠다는 의지와 간절함이 생겼다. DNA속 숨어있는 에너지까지 쥐어짜가며 겨우 1000개를 채웠다. 내 인생 줄넘기 최고 신기록이다. 최선을 다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나도 모르게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조교님이 멀리서 지켜보시더니 점점 나에게 다가오신다.
불안하다.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아까워서라도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힘들면 쉬어가면서 해.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표정을 봐서는 바로 탈락이니 집에 가라는 냉정한 멘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인상과 다르게 너무 반전 같은 따뜻한 조교님의 태도에 안도가 되었다. 역시 사람은 얼굴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다른 친구들은 남은 2회기를 1000개씩 하고 그날 줄넘기 시간이 종료되었다. 어쨌든 첫날 줄넘기는 나의 최고 신기록을 경신하며 스스로에게 너무 대견했지만 예상치 못한 큰 난관들을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될지 고민이 깊어졌다. 끝나고 식사를 하러 가는 시간 오늘이 마지막 줄넘기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착잡했다. 식당으로 자리를 이동한 줄넘기 팀 친구들은 다들 먹고 싶은 메뉴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메뉴판을 보니 갑자기 힘이 난다. 최선을 다해서 음식의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싶었다. 고심 끝에 고른 메뉴는 돈가스 정식! 그래 오늘 최선을 다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돈가스인가.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조교님이 한 말씀하신다.
“내일 피검사 잊지 마세요”
이게 무슨 날벼락같은 소리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검사라는 말을 했던 거 같다. 정말 공짜밥에 눈이 멀어 정신이 나갔나 보다. 그 검사가 피검사를 말한 거였다.
뭐가 그리 유난인가 싶지만 피검사는 나에게 공포다. 워낙 혈관이 약해 주사기로 피를 뽑을 때마다 한 번에 피를 뽑은 적이 없다. 노련한 간호사들도 내 혈관을 만져보면 당황해하며 주사기를 찔렀다 뺏다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제일 고역은 네 번 실패하고 다섯 번째 바늘을 찔렀는데 간호사가 초조해하는 모습을 볼 때부터다. 더 이상 주사기를 찌르기가 미안하니 그때부터는 찌른 바늘을 넣은 상태에서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한다. 미세하고 찌릿하고 쓰라린 통증이 침묵 속에서 예민하게 감지가 되는 순간 온몸이 소름이 돋는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고통이다.
차라리 온몸에 주사를 놓는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더 낫겠다.
'그래 어차피 난 오늘을 마지막으로 마음의 정리를 했으니'
조심스럽게 조교님께 내 마음을 전달하기로 했다.
사실 마음 속 하고 싶은 말은
‘계속하다간 심장마비로 죽을 거예요. 저는 오늘까지만요’ 이지만 착한 조교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싶어 돌려 말씀을 드렸다.
“조교님 오늘 해 보니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너무 모르고 합류를 한 거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조교님은 내 의중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괜찮아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늘리면 돼. 다른 애들도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했어”
그러더니 여기저기 친구들이 눈치 없이 격려의 말들을 던진다.
“나도 그랬어!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아... 이게 아닌데...’
차마 피검사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말을 못 꺼내겠다 어중간한 멘트와 타이밍으로 내 의사는 그렇게 어슬렁 넘어가버리고 식사자리가 끝났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려는데 마음이 급하고 불안해진다.
오늘 정리를 안 하면 계속 발목 잡히겠다는 생각이 드니 결단이 생긴다.
‘이번에는 단호하게 말씀드리자!
하다가 중간에 어중간하게 그만두는 거보다 이게 더 낫지!’
“조교님!”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조교님이 돌아보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