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고 연일 무더운 날씨로 문방구집은 찜질방 그 자체였다. 지금처럼 에어컨은 말고라도 선풍기조차 없었던 터라 차라리 땡볕 아래가 더 시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 삼남매는 하루 종일 땀범벅에 쩔어 6.25 전쟁 기록사진에나 나올법한 행색이다. 그렇게 더위를 참고 견뎌야 했던 때 문방구집에서 유일하게 냉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드통이었다. (지금은 세련되게 아이스크림 냉장고라고 하지만 그때 우리끼리의 언어는 하드통이었다.) 집에 냉장고가 없던 터라 간단한 반찬 같은 건 하드통에 같이 보관을 했다. 엄마가 하드통에서 반찬을 꺼낼 때마다 우리는 냉장고 안의 눈밥이라도 만지고 싶어 기회만 되면 달려들었다. 누가 보면 문방구집 자식들인데 매정하게 아이스크림도 안주는가 싶은 모양이다.
그렇게 하드통은 우리에게는 겨울왕국이었다.
예보에도 없었던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밤.
세찬 빗소리에도 잠이 깼지만 고인 빗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닐천장이 찢어져 우리 식구는 그야 말로 한밤중에 비벼락을 맞았다. 엄마는 동생들이 울 틈도 없이 들고 업고, 나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우산 들 손도 없으니 꼼빡 비를 뒤집어쓰면서 간신히 옆집 아주머니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아빠는 뚫린 비닐천장을 밤새 복구하느라 우리는 아침이 돼서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문방구집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문구류이다 보니 비에 젖을 수 있는 것들은 자기들끼리 젖어 흐물해지고 말라붙어 그냥 쓰레기 더미들이 되어 있었다. 팔아야 되는 물건들을 다 버려야 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하드통이 꺼져서 안에 하드들이 녹아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반찬들은 이미 상해 지독한 음식쓰레기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엄마가 제일 속상하다. 당장 애들 먹일 밑반찬과 식재료가 없다. 하드통이 녹아서 속상한건 우리 삼남매도 마찬가지다. 한여름에 잠시나마 더위를 식혀줄 하드와 만질 눈밥도 없다.
하드통이 꺼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에 세 들어 살았던 주인집 할머니의 만행이었다. 동생들이 갓난쟁이 일 때 둘이 밤낮으로 번갈아가며 우니 시도 때도 없이 집 나가라는 할머니의 구박이 이어졌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둘째는 업고 막내는 안아서 잠을 청해야만 했다. 하루종일 쌓아놓은 똥기저귀를 빨기라도 하면 물소리 난다 야단법석이니 아빠는 한밤중에 똥기저귀 한바구니를 들고 산에 가서 매일 빨고 와야 했다. 그 야단을 못이기고 나온 곳이 바로 옆에 비닐 문방구집이니 할머니는 지날 때마다 우리 식구가 눈에 가시였다. 그러던 중 비벼락으로 정신없던 우리들을 본 할머니는 그 틈에 전기줄을 끈어 버린 것이다. 비가 그친 다음날이 되서야 주인 할머니 아들이 미안하다며 전기줄을 이어주러 왔다. 어찌된 일인지 전기를 이은 후에도 하드통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한 동안 두 분이 말씀이 없으시다. 어린 눈에도 부모님의 사무치는 설움이 느껴졌다.
비벼락 사건 이후 한참동안 라면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온 몸에 땀이 타고 내리는데 얼음 동동 콩국수를 먹어도 모자랄 판에 뜨거운 라면만 먹어야 하다니. 꺼진 줄 알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이나 동생들은 하드통으로 간다. 보고 있는 엄마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다.
가끔 아이가 가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따라 가면 여러 대의 하드통을 본다. 삼남매를 키워내야 했던 젊은 부부에게 하드통은 아린 기억이기도 하다. 거의 40년전 이야기를 우리 부모님은 지금도 하신다. 어제 일처럼. 지나간 일이라고 흘려보내기에는 너무 혹독하고 고된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더 떠나보내기 억울한 추억들이다. 위로 받지 못해 잊지 못하는 거라고 한다.
지금이라도 위로를 드리고 싶다.
견뎌내 줘서 감사하다고.
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다고.
내 아이에게도 이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