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보다 오래가는 힘, 공부 체력

불안을 이기는 '진짜 공부'에 대하여

by 니나맘

요즘 엄마들은 아이가 선행 없이 학교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 큰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나 역시 그 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음을 다잡는다. ‘무’에서 스스로 ‘유’를 만들어가는 학습 과정은 아이에게 돈 주고 살 수 없는 힘을 남긴다고.


난 그 힘을 공부 체력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 체력도 중요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공부 체력은 뇌의 특정 기능을 스스로 단련해 나가는 힘에 가깝다.





텅 빈 OMR 카드에서 시작


나는 일체의 학원이나 선행 없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중3 겨울방학 동안 혼자 고군분투 했지만 중학교 시절 공부했던 부분들을 복습하는 수준이었다. 나는 결국 고등학교 반편성고사를 반도 풀어내지 못했다. 채울 수 없는 OMR 카드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선행 없이 진학한 것이 오히려 신의 한수였다. 최초 성적 시작점이 워낙 낮았기에, 고등학교 3년동안 성적이 꾸준하게 오르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성적이 3년의 우상향이 가능할 정도로 공간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학교 수업만으로 고등학교 수준의 학습을 하나씩 깨뜨려 나간 경험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스스로 고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되어 돌아왔다. 나는 자기주도학습 경험치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쌓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출발점이 낮다 보니 성적이 오르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어 신명이 안 날수가 없었다.


성적이 오르는 ‘결과’ 뿐만이 아니다. 해 나가는 ‘과정’ 또한 신이 난다. 내 힘으로 공부해서 ‘모르는 것’이 ‘아는 것’이 되고, ‘아는 문제’를 풀게 되는 그 과정.





‘안다’는 착각과 ‘깨달음’이라는 단계


누가 가르쳐서 알게 된 지식과 달리, 스스로 이해하고 깨우친 지식은 그 사이에 ‘깨달음’이라는 한 단계가 더 끼어 있다. 타인의 도움 없이 깨달음의 단계를 넘어서는 힘, 그것이 바로 공부 체력이다. 그리고 나는 그 힘이 사교육보다 독학 과정에서 훨씬 강하게 발전함을 경험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내신도, 대입 준비도 모두 혼자 힘으로 해 나갔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나에게 예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보니, 학교 수업도 역시 선행을 마친 학생들 수준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은 습관이 된다. 매일 예습을 하다 보니 예습하지 않고는 어떤 수업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학원에서 이미 선행을 마친 친구들은 어땠을까. 학교에서 접하는 내용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난 주변에서 '이미 안다'는 감각이 오히려 공부를 느슨하게 만드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입시보다 긴, 인생이라는 마라톤


물론 학원에서 배운 선행 내용을 자신의 확실한 지식으로 만드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지식의 양만으로는 마라톤 같은 입시를 끝까지 버텨낼 수 없다.


게다가 공부란 무 자르듯 대학 입시에서 딱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학 입학 이후에도 수시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인생의 단계와 고비들을 스스로 공부하며 뛰어 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배우고 깨치는 힘’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길은 크게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공부 체력’이다.


새로운 지식을 머릿속에 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

그리고 돈이나 시간, 나이라는 물리적 제약 앞에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힘.



사교육을 절대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아이도 학원을 다니고 있다.) 다만 자기주도적 학습의 기반 없이 사교육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오히려 공부 체력을 약화 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이마다 공부 체력을 기르는 방식은 다르다. 나의 경우처럼 독학하다 자연스럽게 깨칠 수도 있지만 어떤 아이들은 학원이나 강사들의 방식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에게 맞는 학습법을 찾아갈 수 있다. 중요한 건 ‘어떤 방식이든 아이 스스로 이해하고 넘어서는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이다.





공부 체력은 성적보다 오래 가는 힘이다. 아이의 성장은 선행의 속도가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는 순간들로 이루어진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쌓이는 그 힘이 아이의 인생을 긴 호흡으로 지탱해 줄 것이다.


오늘도 아이의 느린 진도, 아이 친구의 유창한 영어에 마음을 졸이게 되다가도, 잠시 멈추고,

조급해 말자고 다짐해 본다.

우리 아이는 뒤처지는 것이 아니라, ‘공부 체력’을 기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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