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사실 이혼 당사자 아닙니까
따스한 햇살이 유난히 기억나는 그 날 아침, 우리가 잠시 거처하던 외갓집 이모 방에서 엄마에게 아빠와의 이혼 소식을 들으면서 의외였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혼과 그 사유 모두 진정으로 이해하겠는데, 딱 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
“너희는 앞으로 아빠와 살게 될거야.”
이혼의 잘잘못을 굳이 따지자면 원인은 명백히 아빠에게 있었다. 아빠의 경제적 실패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사춘기 자매의 양육권은 아빠에게 간다고 하였다. 왜?
돈, 그래 애 키우는 데에는 돈이 드니까.
그런데 경제 상황은 아빠보다 엄마가 더 나을 터였다. 이혼 직전 약 반년을 아빠는 빚쟁이를 피해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돈이 얼마가 있든 아빠의 마이너스보다 나을 것이 아닌가.
게다가 우리는 아빠와의 유대관계가 사실상 거의 없었다. 가정에서 육아의 99%는 엄마 담당이었다.
엄마는 이상적인 엄마였다. 내가 임신했을 때, 엄마만큼 아이에게 잘 해 줄 자신이 없어서 걱정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막 접어든 시기, 이혼하면서 누구와 함께 살지 우리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될만한 나이였다. 엄마 아빠 이혼하면 누구 인생이 가장 심하게 바뀌냐 이 말이다.
아이도 이혼 가정의 당사자 아닌가?
나는 내 예민한 사춘기를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경상도 사나이 아빠와 함께 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것도 엄마라는 ‘버퍼’ 없이. 하지만 내 의견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동생과 힘이라도 합쳤다면 좀 더 항의를 강하게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엄마 아빠의 이혼은 동생 모르게 진행되는 것이었다. 한 살 터울의 동생이, 동생이니까 어리니,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주겠다는 엄마 아빠의 결정이었다.
“아니, 아빠가 집이 어디 있어? 어디서 같이 산다는 건데?”
전국을 돌며 숨어 지내던 아빠의 근황을 마치 마지막 희망인 양 붙들어 봤지만, 집도 이미 정해졌다고 했다.
분명히 기억한다. 난 부모님의 이혼을 무던하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아빠와 살기를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어떻게 설득해도 피폐해진 엄마의 귀에 전혀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내가 소위 ‘어리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크면 다 이해할’ ‘어른들의 일’은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었고, 엄마와 헤어져 아빠 집으로 들어가야 할 날은 플랫폼에 진입하는 ktx 속도 마냥 미친듯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삿날이 다가오는 그 시기, 밧줄로 목을 죄는 듯한 숨막힘과 압박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 아빠의 이혼 사실을 모르는 동생은, 드디어 외갓집에서 탈출하여 ‘우리 집’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삿날 나는 이사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외갓집에 있던 소박한 나의 짐은, 동생이 그렇게 내 욕을 하며 쌌다고 하였다.
이삿날 늦은 저녁 결국 내가 어디로 갔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고집스레 외갓집으로 귀가하여 엄마가 아빠집으로 데려다준건지, 아니면 결국 내발로 아빠집으로 귀가한 건지 말이다.
기억나는 건 혼자 짐을 싸고 풀었다고 도끼눈을 한 채 기다리던 동생의 얼굴. 그리고 뜨악할 정도의 컨디션과 크기를 자랑하는 ‘그 집’과의 첫 만남이다.
인생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극도의 스트레스를 겪던 그 때, 아빠에게 양육권을 넘겼던 엄마의 그 결정을 정말 나이를 먹으면 이해할 수 있게 될까 기다렸다. 부모의 이혼 자체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이혼 후 우리의 삶을 이렇게 결정한 부모의 결정 또한 언젠가는 이해할 날이 올 것이라 한편으로는 믿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임신하고, 출산하여, 아이를 초등의 나이까지 키운 40대 지금의 나는 그때의 상황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솔직히 아직도 이해 못하겠다. 내 새끼, 어디 조금만 다쳐도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주는 오장육부 같은 내 아이. 어떻게 떼어 놓고 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글쎄 그래도 상황이 다르잖아, 남편이 망해서 빚쟁이 피해 도망 다녀 본 적 없잖아, 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애초에 아빠와 내 남편이 너무 다르니까. 아빠는 한 방울의 다정함도 몸에 지니지 않은 무뚝뚝한, 가족보다 친구들 앞에서 위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직접 경험해 본 것이 아닌 것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라며 내 마음을 토닥여 본다.
꼭 이해해야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나는 잠시 비뚤어질 궁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소중한 건 나 자신이라, 나를 망가뜨리면서 어른들에게 시위하는 방식은 별로 나와 맞지 않았다. 방법은 단 하나, 적응밖에 없었기에.
여튼 그렇게 아빠와 우리 자매의 숨막히는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 최악의 시기를 만들어준 바로 ‘그 집’ 살이도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