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선택에 관해서
어느 순간부터, 내 주변에는 선택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멘헤라’라는 말로 불리는 친구들. 정신적으로 지쳐 있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며, 자주 자기혐오에 빠져있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하나의 공통된 요소가 보이곤 한다.
결정 앞에서 멈춰 선 채, 시간을 흘려보내는 모습이다. 물론 결정을 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멘헤라인 것은 아니지만, 아무렴 근래 보이는 정신질환 친구들 (이하 멘헤라)이 대체적으로 선택장애의 양상을 띠는것은 꽤나 자명하다.
“아무거나 괜찮아.”
“네가 정해.”
“지금은 생각하기 싫어.”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이 말들은 편안해 보이지만, 사실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 선택지 앞에 서는 순간, 그들의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무게가 얹힌다. 잘 고르면 아무 일도 없지만, 잘못 고르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 그래서 그들은 결정을 유예한다. 오늘을 넘기고, 이번 달을 넘기고, 어느새 몇 년을 흘려보낸다. 모든 선택을 유보하면서.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인간은 선택하지 않을 자유조차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짐에 가깝다. 그는 이를 ‘자유의 형벌’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멘탈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특히 잔인하게 다가온다. 이미 충분히 불안한데, 그 불안을 만들어낸 책임마저 자기 몫이라고 말하는 셈이니까.
키르케고르는 선택 앞에서 느끼는 이 불안을 ‘현기증’에 비유했다. 절벽 위에 선 사람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선택은 가능성의 창구이나, 가능성은 언제나 실패를 포함한다. 그러기에 선택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공포다.
이런 친구들이 선택을 회피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 이후에 찾아오는 자기 붕괴를 두려워한다.
일반적인 사람에게 실패는 “다음엔 다르게 하면 되지”로 끝나지만, 어떤 사람에게 실패는 “역시 나는 안 되는 인간이야”로 이어진다. 이때 선택은 더 이상 중립적인 행위가 아니다.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하는 도박이 된다. 그러니 선택하지 않는 쪽이, 차라리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생긴다.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책임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삶은 그 여백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결정되지 않은 선택에는 관성, 타인의 의지, 우연이 대신 들어온다. 그렇게 끌려간 삶은 점점 더 낯설어지고, 결국 이렇게 묻게 된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지?”
이 질문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러기에 나는 요즘 ‘선택하라’는 말 대신, 선택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거대한 결단이 아니었다. 삶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하고도 장엄한 선택이 아니라, 단순하게 지금 여기에서의 구체적인 태도였다.
오늘 연락할지 말지.
지금 씻을지 말지.
이 글을 끝까지 읽을지, 덮을지.
산책을 할지 말지.
이런 사소한 선택들은 실패해도 인생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복되면 방향성을 만든다. 선택이 아니라 반응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은 결정들. 그 정도의 무게라면, 누구나 감당할 수 있다.
선택을 회피하는 삶은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너무 많은 선택에서 다쳐온 사람의 생존 기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단이 아니라, 부서지지 않을 만큼 작은 선택들이다.
삶을 바꾸는 선택은 언제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작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