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생활기록부에 이렇게 적었다.
“반장이지만 봉사심이 부족함.”
그 문장은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그때의 나는 문제아도, 이기적인 아이도 아니었다. 다만 아주 단순한 질문을 했을 뿐이다. 반 친구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 있다고 믿었고, 모두가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왜 ‘반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를 더 도와야 하고, 더 참아야 하며, 더 희생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공평하지 않다고 느꼈고, 그 불공평함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돌아온 답은 설명이 아니라 평가였다. ‘봉사심이 적다’는 한 줄.
그때는 몰랐다. 그 문장이 단지 어린 시절의 오해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비슷한 장면을 반복해서 마주한다. 연차가 낮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정도는 네가 해야지’라는 말과 함께 온갖 잡일이 주어진다. 이유는 늘 명확하지 않다. 원래 그렇다, 다 그렇게 한다, 사회는 그런 곳이다. 불만스럽지만 묵묵히 한다. 조직생활이란 원래 불평등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그래도 마음 한편은 늘 불편하다. 이건 정말 당연한 걸까, 아니면 또다시 공평함을 질문했다는 이유로 철없다는 평가를 받게 될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다들 속으로는 불편해하면서도 말하지 않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 어딘가에서, 회의실 한쪽에서, 사무실 책상 앞에서, 혹은 처음 사회에 발을 디딘 누군가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이건 늘 내 몫일까.” 그 질문을 삼킨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과 마주친다면, 우리는 말없이도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고.
이제는 안다. 공평함을 묻는 마음이 봉사심의 부족은 아니라는 걸. 그것은 오히려 기준을 고민하고, 관계의 구조를 바라보는 감각에 가깝다. 문제는 질문이 아니라,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다. 모든 희생이 미덕으로 포장될 때, 그 안에서 누군가는 조용히 소진된다.
결론적으로, 나는 여전히 완벽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불편함을 느끼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공평함을 묻는 질문은 유치함이 아니라 성찰의 시작이라는 것. 그리고 이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작은 연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