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다시 가고 싶다.

스페인 여행

by 양정회

지난해 시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여행하며 세비야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십 년 전, 패키지여행으로 스쳐 지나갔던 곳을 다시 찾았다. 그때는 ‘봤다’라는 기억만 남았고, 이번에는 ‘머물렀다’라는 추억으로 남았다. 그런데도 사흘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코르도바로 떠나는 날, 아직 다 보지 못한 골목이 나를 붙잡는 것 같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나는 세비야의 골목을 걷고 있었다. 하얀 벽 사이로 스며들던 오후의 햇살, 주황빛 타일이 반짝이던 건물, 창가마다 매달린 화분과 바람에 흔들리던 커튼. 그 장면들이 오래도록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왜 그토록 세비야에 끌리는 걸까. 아마도 그곳에는 ‘속도’보다 ‘리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쁘게 소비하는 여행지가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도시라서.

아침이면 과달키비르 강변을 따라 걷거나 가볍게 달리고 싶다. 강물 위로 번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하루를 느리게 열어가는 시간.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 도시의 호흡에 나를 맞추고 싶다.
골목 안 작은 바에서 브런치를 먹고, 마차 타고 도시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그 도시에 머무는 사람처럼.
스페인 광장에서는 반원형으로 펼쳐진 광장과 운하, 그리고 타일 벽화를 보고 그 역사 속으로 잠시 빠져든다.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된다.
세비야 대성당 안에 들어서면 인간의 시간이 얼마나 작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서 있던 그 침묵의 순간, 나는 여행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임을 깨닫는다.

메트로폴 파라솔 위에서 바라본 일몰도 잊히지 않는다. 버섯 모양의 거대한 목조건물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 멀리 보이던 성당의 실루엣. 구조물 옆 루프탑 카페에서 띤 또 데 베라고 노 한잔을 천천히 기울이던 저녁. 해가 내려앉는 속도만큼 내 마음도 고요해졌다.

밤이 되면 플라멩코 공연장으로 향한다. 세비야의 플라멩코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다. 발끝으로 내리찍는 리듬, 손끝의 곡선, 목소리에 서린 한과 열정. 그 격정 속에서 나는 묘한 위로를 받았다.
요즘 나는 자주 상상한다. 다시 세비야에 간다면, 사흘이 아니라 한 달쯤 머물고 싶다고. 여행 일정표 대신 일상의 리듬을 갖고 싶다. 아침엔 강변을 걷고 낮엔 골목을 서성인다. 그리고 저녁엔 노을을 마시며, 밤엔 플라멩코 박자에 숨을 맞추는 삶.
내가 좋아하는 구름이 몽글몽글 떠 있는 저녁 하늘 아래에서 오래 걷고 싶다.
세비야는 내게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조금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도시다.
그래서 나는 안다.
언젠가 다시 그 골목을 걷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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