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걷으면 사랑받은 내가 있다
상담을 통해 나에게 숨겨진 에너지를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과업이기에, 엄마에게 나는 어릴 때 어떤 아이었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기억하는 부모님 이혼 전의 '나'와 이혼 후의 '나'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아빠가 이혼하기 전의 나는 사랑과 관심을 많이 받으며 커서 어딜 가던지 기세 등등하게 돌아다녔다고 하셨다. "동네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가 나서 달려가 봤더니 네가 남자애 위에 올라타서 신나게 두들겨 패고 있었지."라고 하시며 흐뭇하게 웃으신 적도 있었다. "그렇게 당당하던 네가 이혼 후에 기가 죽어서 있는 걸 보고 어찌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라고 하시며 미소가 슬프게 바뀌기도 했지만.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전의 어릴 적 사진들을 보면, 웅변대회에 나가서 주먹을 하늘 위로 찌르며 연설을 하는 나의 당당하고 푸릇푸릇한 사진도 있는데,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면 내가 웅변을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웅변을 못해서 이 학원에 보내졌고 훈련의 결과로 이런 사진이 찍힌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 웅변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 왔던 기억도 나는 걸 보면, 웅변에 소질이 없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청소년 시기의 나는 정말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발표불안을 이겨내느라 너무 힘들어했기 때문에 나의 과거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는 어떤 아이였을까. 부모님의 이혼으로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나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지기 전에 나는 어떤 성격을 가진 객체였을까.
엄마의 답은 간단했다. "넌 어딜 가나 사랑받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관심받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
상담가에게 엄마와 할머니가 해줬던 이야기들을 전달하면서, 나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아이였던 것 같다고 말하자, 상담가는 3살 정도면 성격이 형성되기 때문에 아마 그 성격이 나의 핵심 성격일 거라고 하셨다. 엄마가 날 어떻게 키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할머니가 부모님의 이혼 전과 후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면, 내가 자신감 있고 활달한 성격을 형성할 수 있도록 엄마가 많은 에너지와 사랑을 주었을 거라고. 원래 내 안에 적극성과 활달함이 있고, 그게 상처로 덮여있을 뿐이니까 상처를 걷어내고 아픔을 다 울어내고 나면 어렸을 때의 성격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올 것이라는 말도 해주셨다.
상담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최근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는 나의 몇 모습들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내가 20대 초반엔 발표 불안이 심했는데, 노출 치료처럼 계속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노출되다 보니까 점차 나아졌고, 대학원에 가서는 내가 사실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발표하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내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상담가는 내 안에 원래 그런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영어학원에서 첨삭 조교를 하면서 느낀 변화다. 학원의 영어 글쓰기 반에서 조교 알바를 하는데, 일은 크게 1) 매주 학생들의 글을 첨삭하기 2) 수업시간에 첨삭한 거 설명해주기 3) 이번 주에 쓸 글의 개요 짜는 것 도와주기. 이렇게 3파트로 나뉜다. 말했듯이,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가서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낯가림도 있고 부끄러움도 많았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친해지려고 잘해주고 살갑게 구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잘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주어질 때면 나는 의도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평소의 나와 다른 행동으로 친절하게 대화를 나눌 수는 있었다. 대신에 그러고 나면 나는 에너지를 엄청 소모하고 집에 돌아오게 되는 전형적인 내향형 인간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학원에서는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도 내게는 또 다른 챌린지였다. 나는 겨우 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익숙해졌다 싶으면, 새로운 사람과 다시 친해져야 했다. 조교들도 자주 바뀌어서, 이 조교와 일 하는 것이 잘 맞고 좀 친해졌다 싶으면 새로운 조교로 바뀌어 버렸다. 원래 살던 방식이 아닌 다른 자아를 꺼내서 살아야 하니까, 에디팅 잡을 하고 나면 집에 가서 3시간을 기절해서 잤다. 나의 일주일짜리 사회성을 다 써버려서.
나는 조교 알바를 하면서 내가 내향적인 인간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고, 조교일 하는 것에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서 하루를 다 소비하게 되니까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을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처음 보는 사람과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친근한 사람으로 접근하는 능력이 나에게 결국 필요한 능력인데, 지금 이 기회를 통해 나의 힘을 길러볼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여기서 버텨서 내가 이 정도는 해도 피곤하지 않게 마음을 단련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면서.
나는 버티는 걸 좋아하고 포기하는 걸 싫어하는 변태니까,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그리고 2-3개월이 지나자 익숙해져서 피곤하지 않았다. 나는 이걸 발표 불안을 이겨냈던 것처럼 이 상황을 버텨서 맷집을 늘린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상담가는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다. 내 안에 원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만약 내 안에 그런 성향이 없었다면, 분명히 포기했을 거라고. 하지만 내 안에 적극성과 활달성이 원래 있었고, 처음에는 그걸 꽁꽁 묶어 둬서 풀어내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든 것이지만, 이제 점점 풀리면서 내 안에 있던 게 펼쳐져 나오는 거라고 해석해 주셨다. 상담가는 몸을 이용해 속박에서 풀려나는 날개 달린 사람을 흉내 냈다. 그게 마치 내면의 나를 형상화하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앞으로가 희망적이면서도 어린 내가 너무 불쌍해서 슬펐다. 슬픔 뒤에 가리어진,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 했을 어린 내가 보였다.
상담가는 이미 내가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자신감 있고 당당해 보인다고 했다.
한 날은 매주 주말마다 친구들을 만나는 내게 그런 말을 하셨다.
"외향적인 사람이죠?"
나는 너무 놀랐다. "저는 평생 내향적이라 생각했는데요!"
"내향적인 사람은 그렇게 매 주말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아요."
그제야 내향형이었던 내가 대학원에 와서 해본 MBTI의 결과에서는 외향형으로 진단받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난 항상 과거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는데, 내 과거가 나에게 무엇을 줬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래서 무엇이 나를 묶고 있었는지, 그리고 나의 어떤 부분이 묶여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점점 내가 무엇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묶여 있었고 어떻게 묶여 있었는지 알게 되면서 나를 점점 자유롭게 놓아주게 되었다. 내가 과거에 기반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기반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결정할 수 있도록, 과거의 망령이 아닌 '진짜' 내가 되어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