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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Nov 10. 2021

3-3. 어린 내가 상처 속에서 살아남은 방법

2) 어릴 적 방식을 버리면 나는 새로운 내가 된다

상담을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나는 부족한 나 자신이 견디기 힘들어 괴로워졌다. 나의 어리석음과 친구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와 숨이 막혔고, 며칠 고민을 한 결과 친구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달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이렇게 관계가 끝나더라도, 십여 년 동안 나의 곁을 지켜준 친구와 이런 이별을 맞이한다는 건 우리 관계의 깊이에 비하여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친구에게 내가 상처받았던 부분과 친구에게 상처줬던 부분에 대해 담은 솔직한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한참 뒤에서야 친구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친구는 구체적인 나의 행동을 언급해주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부터 나와 함께할  상처를 받곤 했다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해주었다. 친구도 내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나도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지만 친구는 나와 앞으로 관계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고 서로 응원하는 사이로 남자는 말을 마무리로 우리는 십여 년간의 인연을 정리하였다.


   M과의 일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M에게 했던 것처럼 비슷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조금씩 되돌아보았다. 생각보다 꽤 많은 사건들이 떠올랐다. M은 나에게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지만, 기분 나쁜 티를 낸 사람들도 있었고 당황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불쾌한 표시를 하는 사람들에겐 조언하거나 섣부른 도움을 주려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았었는데, 내 행동을 멈추기는 했지만 상대방이 불쾌해하는 이유는 그저 불편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라고 여겼지 내가 불쾌한 행동을 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엄마, 선생님, 상담가의 역할을 해왔던 걸까? 중학생 때부터 롤링페이퍼를 할 때면 항상 적혀있던 ‘무진이는 엄마 같아~’라는 멘트들, 어릴 때 ‘장녀인 네가 동생에게는 엄마 대신인 거야.’라고 일러주던 어른들의 말들. 그때부터 나는 가족 내부적으로도 엄마 역할을 부여받았고, 그 역할이 익숙해진 나는 학교에서도 엄마의 탈을 쓴 아이가 되어있었던 거였다.


  상담가와 엄마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대체 엄마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나의 친엄마는 엄마 역할을 했던 적이 있던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엄마가 친구 같았던 순간들은 기억나는데, 엄마에게 모성애를 느낀 기억이 안 나요. 아주 어릴 때 기억 중 하나는 가족 동반으로 아빠 친구들 모임에 갔었는데, 아빠가 술에 취해 산에서 뻗어버리자 엄마가 화가 나서 ‘나는 택시 타고 갈 테니까 너흰 아빠랑 오던지 알아서 해. 아빠 호랑이에 잡아 먹히든지 말든지.’라고 말하고 택시를 잡아타고 가려고 했던 거예요. 그 말에 저는 엄마에게 버림받을까 무서워 엄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며불며 매달렸어요.”


상담가는 그 얘기를 듣더니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무진 씨의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하지 못했어요.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무진 씨는 엄마와 같은 위치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엄마는 자기만 챙기는 성격이에요. 그게 어쩌면 핵심 성격일지도 모르죠. 친구 같은 엄마는 될 수 있지만, 엄마가 친구가 될 수는 없어요. 친구 같은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하지만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엄마와 같은 위치였을까? 난 어릴 적 기억을 더 더듬어 보았다.


“아빠는 울산에 돈을 벌러 가고, 저랑 동생은 엄마랑 대구에 있었어요. 그때가 아마도 제가 4~5살, 동생은 2~3살이었을 거예요. 아빠가 돈을 규칙적으로 보내주지 않아서 엄마는 일을 하러 나가야 했어요.”


상담가는 놀라며 그럼 어린 나와 동생은 누가 돌봐줬냐고 물었다.


“기억나는 장면은, 엄마가 어디 나간다고 나와 동생에게 떡볶이 사놓은 거 먹으며 잘 기다리라고 하던 장면이에요. 그렇게 둘이서 엄마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상담가는 뭔가 알아차린 듯 나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때부터 무진 씨는 엄마 역할을 했을 거예요. 무진 씨도 어렸기 때문에 엄마가 필요했을 텐데, 어린 동생에게 엄마 역할을 하면서 가치감을 얻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나는 엄마의 부재로 오는 결핍을 스스로 엄마가 됨으로써 채웠던 것이었다. 엄마 역할을 하는 것이 나에게 가치감을 주고,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꾸만 누군가에게 엄마 역할을 하려고 하고 엄마 역할을 원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인간관계의 패턴을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


“무진 씨는 엄마 역할을 해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사실 원하는 건 엄마였죠.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해요. 엄마는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느낄 수 있게 하는 존재예요, 무진 씨는 본인이 원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있었던 거예요.”


  나의 결핍을 발견하는 건, 상처 받은 어린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상처 받은 어린 나를 안고 가여워서 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그리고 동생과 엄마를 책임지기 위해 그 작은 머리로 애써 찾아낸 어리숙한 방법으로 삶을 버티고 싸워온 나를 위로한다. 다 큰 나는 어린 내가 손에 피가 나도록 쥐고 있던 짐 하나를 내려놓게 한다.


  이제 더 이상 이 짐을 네가 질 필요 없어.


  나는 이제 그때의 아이가 아니고, 삶과 환경이 바뀌었다. 이제 나는 어릴 때 살아남았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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