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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Nov 06. 2021

3-3. 너와 헤어지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1) 다른 방법을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어

꿈을 꿨다. N이 동생과 나 사이에 누워 한 이불을 덮고 있는 꿈. 이불이 우리를 다 덮기에는 충분히 크지 않아서 둘은 서로 자신 쪽으로 이불을 조금씩 끌어당겼다. N은 그 와중에 자꾸만 자기 쪽으로 이불을 더 잡아당겨서 내가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N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나는 싫어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N은 외롭고 쓸쓸해서 우리 집에 온 거였다. 가족의 사랑을 느끼고 싶어서.

 

    꿈에서 N과 나는 점점 친구가 되어갔다. 할머니는 내가 N과 친해지는 게 걱정되어서 자꾸만 우리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동생은 N이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N은 그저 엄마의 사랑을 느끼고 싶은 거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N이 원한다면 난 계속해서 N의 엄마 역할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폐허가 된 집. 아무것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쥐면 바스러지는 재만 남아있었다.


    그게 내 마음과 같았다.





    M은 고등학생 때부터 십여 년 동안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가장 기쁜 순간에도 그녀가 있었고, 가장 슬픈 순간에도 그녀가 있었다.


    그런 M이 나와의 관계를 끊었다.


    M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건 사실 5~6년 전부터였다. 그녀는 힘들 때면 항상 나를 찾았는데, 내가 아주 힘들 때도 그녀는 나를 찾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내가 너무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녀는 나를 찾으며 말했다. ‘네가 너무 힘든 거 알아. 하지만 나는 지금 네가 너무 필요해.’


    어쩌면 우리의 삐걱거림은 나의 부족한 마음의 여유에서 시작된 걸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나는 그녀를 사랑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냉정하고 아픈 마음이 되곤 했다. 그런 양극단의 마음을 숨기려고 애쓰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나는 가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아픈 말을 했고,  M은 가끔 내가 하는 말에 반박을 하였다. 반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상담 선생님이 나는 ~한 성격이래’라는 류의 말에도 그녀는 반박을 하였다. 그렇게 종종 서로 날이 선 대화를 나누다가 결국에는 감정의 골이 터지고 만 것이다.

 

    M과 날 선 대화를 나눈 다음날, 나는 M에게 쌓인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몰라서 나의 심정을 아주 두루뭉술한 글로 써 SNS에 올렸다. 과거의 나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숨겼지만, 상담을 받으며 점차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감정을 어떻게든 분출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 글에서 자신을 읽어낼 수 없을 거라 자신했기에 공개적인 자리에 글을 써서 올렸던 것인데, 예리한 그녀는 나의 글에서 자신을 읽어냈다. 우리가 오랜 세월 함께한 만큼, 그녀는 나를 알았고, 그리고 그녀 자신도 잘 알았다. 그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닌 그녀를 향한 저격글이 되었고, 나는 그녀의 반응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함을 느끼기도 했다.   


    상담가는 내가 한 행위가 ‘공격성’이라고 일러주었다. ‘무진 씨도 공격성이 있어요.’ 내가 올린 그 글이 공개적인 장소에 게시된 만큼 M에게 큰 상처를 주었을 거라고, 글에 주어가 없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공격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 글을 올리고, 그 글 때문에 M이 내게서 떨어져 나간 것에 후련함을 느낀 건 내가 쌓아놓은 감정을 그 글로 터트렸고, M은 나의 공격에 맞고 쓰러졌기 때문에 공격이 먹혀서 속이 후련한 거라고 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상담가의 말에 오만한 내가 보였다. 오만한 나. M이 글에 내포된 의미를 모를 것이라 예상한 오만한 나. 결국 좋지 않은 방법으로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인연을 잃어버린 어리숙한 나.


    상담가는 누구나 공격성이 있지만, 그렇게 표현하는 건 좋지 않다고 했다. 친구는 소중한 존재니 그렇게 터지기 전에 솔직하게 소통을 했어야 했는데 둘 다 모호하게 말하고 티 내지 않는 스타일이라 소통이 안 된 것 같다고 해석해 주었다.


    다른 친구들과 내 행동에서 M이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을 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었는데, 내가 한 행동들 중에 몇 가지(친구의 사생활을 위해서 그 행동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가 친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단점을 들추어내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상담가는 단점을 들춰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다고, 아마 가르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무진 씨가 친구에게 어떤 역할을 하려고 한 것 같나요?’


    갑자기 ‘역할’이라니 나는 너무 뜬금없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내가 어떤 역할을 했단 말인가? 내가 끝까지 답을 하지 못하니까 상담 선생님이 대신 답을 내려주셨다.


    ‘무진 씨는 M에게 언니, 엄마, 선생님, 상담가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친구로서 수평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수직적인 상하관계처럼 대했기 때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반발심을 생기게 했고, 그래서 M이 계속 무진 씨의 말에 반박했던 거예요.’


    M이 힘들 때 나를 찾았던 이유는 내가 그때마다 적절한 조언이나 공감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선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녀가 나의 조언이나 도움을 필요로 해서 나에게 힘든 상황을 털어놓았다고 여겼지만, 사실 친구 사이에서 알맞은 행동은 조언이 아닌 공감이었고, 나의 조언은 친구라는 수평적인 행위가 아닌 수직적인 행위였고, 선을 넘는 행위였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불편한 행동이었는데 나는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M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그 행동이 기분 나빴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상담가의 해석을 들려줬을 때, 모두가 선을 넘는 행동이라고 동의한 것을 보면 상담가의 해석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M이 나의 말에 계속 반박하려고 했던 것이 이해되었다. 우리의 관계의 어긋남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상담가의 해석에 충격을 먹고 머리가 새하얘진 나에게, 상담가는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려고 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잘 관찰해 보라고 했다. 내가 집에서 가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곤 했던 것 또한 집에서 엄마, 언니, 선생님, 상담가의 역할을 한 거라고 했다. 집에서 하던 역할을 밖에서도 계속했고, 그렇게 너무 굳어져서 쉽게 바뀌긴 힘들겠지만 변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아주 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해 주셨다.


    ‘역할은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만 발휘해야 하는 거예요. 엄마여야 할 때 잠시 엄마 역할이 되었다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고, 선생님이어야 할 때 잠시 선생님 역할이 되었다가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해요. 역할로 살아가면 안돼요. 역할은 자기 자신이 아니니까. 엄마 역할로만 살아가면, 남자 친구도 내게 엄마 역할을 원하는 남자들만 만나게 돼요. 그럼 엄마처럼 남자에게 사랑만 퍼주고, 무진 씨는 돌려받을 수 없어요.’


    역할로 살아가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그 말이 너무 어렵고 추상적이어서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지? 나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나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역할이 차지하던 자리에 나를 세우라고 하셨는데, 역할이 차지하던 자리가 어디며 거기에 세워야 하는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 말대로 나는 너무나도 변하고 싶었다. 나는 더 이상 엄마 역할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의 삶을 다르게 살고 싶었다. M이 버거워졌던 이유도, 결국 나는 ‘진짜 엄마’도 ‘진짜 상담가’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역할극을 그만두고, 나 자신으로써 사람들과 교류해야 했다.


    상담가는 이번에 굉장히 중요한 주제를 시작한 거라고 했다. 내가 감정 표현에 점점 더 솔직해지고, 점점 더 상담가의 역할을 안 하려고 하면서 내게 그런 걸 기대했던 사람들이 실망하거나 지금처럼 멀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이번 같은 일이 없도록 관계를 잘 다스리는 걸 병행해 가면서 ‘나’를 세워가자고 하시며 상담이 끝났다.


    나는 멍청한 얼굴이 되어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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