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가려는 저항을 이겨내기
③ 긍정적인 변화에도 저항은 찾아온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저항을 이겨내기
상담에서 내가 상대방에게 자신을 털어놓게끔 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상대방이 나에게 자신을 털어놓게 함으로써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된 뒤로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행동과 말을 더 조심하게 되었다. 나의 어떤 부분에서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지 아직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말 한마디, 행동 한 마디가 조심스러웠다.
그 당시 나는 디제잉 강습을 계속 받고 있었는데, 디제이는 가끔 나와 깊은 얘기를 하고 싶은 것처럼 느껴졌고, 그에게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냄새가 나서 나는 수강생으로서의 거리감과 위치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상대방도 그 위치와 거리를 지켜주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가끔 하는 대화들을 통해 디제이에게 ‘아빠’라는 주제가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고 나는 그 주제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나는 그의 배경을 모르기에 어떤 말이 그 주제를 건드리게 될지 모른다는 거였다.
설날 전 주였다. 나는 스몰 톡의 주제로 설날에 고향에 가냐고 물었다. 그는 가족이 친척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모이지 않는다고, 그냥 가족들끼리 여행이나 간다고 했다. 나는 그것도 좋겠다고 했다. “여자애들은 제사 안 지내는 거 부럽다고 하더라고요.”
의미 없는 말을 하며 담배를 피우던 그는 말을 마치고 잠시 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아빠라는 주제가 그에게 깊은 의미를 갖고 있었던 거구나. 그는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화들을 하나씩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그는 일인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앉아있는 내 앞을 이리저리 걸으며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주었다. 나는 그의 절망과 공허가 뒤섞인 눈을 보면서 울고 있는지 궁금했다. 왜냐하면 나는 울고 있었으니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커다란 슬픈 감정이 내 마음에 자리 잡았는데도 나는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눈물을 삼켰다. 고통의 당사자가 울지 않고 있는데 내가 우는 것은 내가 그의 울 권리를 빼앗아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눈물의 주인공은 당신이어야지 내가 아니어야 한다고, 내가 우는 순간 내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니까 그것만큼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다.
강습이 끝나고 소진되어버린 듯한 그를 뒤로하고 집으로 오면서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이 아픔과 눈물은 뭘까. 왜 나는 10번도 채 보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에,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이야기에 이렇게 큰 아픔을 느끼는 걸까. 그의 삶이 기구한 것은 맞지만, 그보다 더 기구한 사람도 많을 텐데 왜 나는 그의 이야기에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고 한없는 우울의 구렁텅이에 끌려 들어가는 걸까. 연휴로 상담도 가지 못하기에 나는 시집 한 권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떠났다.
연휴 때 이제니 작가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라는 시집을 읽으면서 내 슬픔을 마주하고, 그의 슬픔을 마주하며 눈물을 게워냈다. 나는 그의 마음을 모르고, 그도 나의 마음을 모르지만 이 생생한 슬픔만큼은 진짜였다. 지금까지 모든 슬픔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왜 슬퍼야 하는지 몰라도 슬플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가 말했던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면서 자꾸만 슬퍼졌다. 그 사람의 큰 감정의 일부가 나에게 옮아온 것 같았다.
상담에 가서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하며 한 번 더 울었다. 상담 선생님은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울고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다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울지 않았다.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고, 눈물을 훔치지도 않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도 않았다. 그저 눈이 번쩍였다. 어둠에서 빛을 찾는 사람처럼. 절망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사람처럼.
상담가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그가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방어하고 있어서 나에게 투사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 감정이 내 마음에 심어졌고, 거기에 내 개인사에서 비롯된 감정이 있으니 합쳐져서 슬픔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 같다고. 그 사람에게서 비롯된 감정과 내 감정이 합쳐져 감정이 더 벅차 졌다는 건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감정을 투사한 줄은 몰랐다. 그리고 내가 상담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투사받았던 감정을 다시 선생님께 보냈는지 선생님도 마음이 공명되며 눈물이 나고 슬프셨다고 하셨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힘이 많이 생겨서 그 감정을 버틸 힘이 있었고 그래서 그 감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셨다. 그 사람이 느껴야 할 감정을 내가 대신 느낀 것이라고. 이번 일화로 알게 된 것은 디제이가 마음속에 쌓아둔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짐들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순간 그 사람이 훅 들어올 것 같다고 예상하셨다. 그 사람이 나를 감정쓰레기통으로 여기지 않도록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가에는 딱히 명쾌한 해답이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계속해서 여기까지가 우리의 거리라고 계속 표현해야 상대방도 그걸 지킬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문제는 선을 긋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역동과도 싸워야 했다. 그와 가까워져서 상처를 도와주고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 그래서 그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했다. 그건 현재의 ‘나’로써 그와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그림자인 ‘나’로써 그와 상호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워내야 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이 감정과 역동의 고삐를 힘겹게 붙잡고 그와 남은 강습을 해내갔다. 상담가는 내가 힘이 생겨서 그걸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 해오던 행동을 멈추는 것이 너무 괴로워 상담가 앞에서 자주 울었다. 이 작업이 내게 의미하는 것은 엄마와 새엄마에게 버림받았던 상황과 동일한 상황에서 버림받을 각오와 의지를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의미 없는 사람이 되어도 내 존재가 의미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나의 존재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디제이뿐만 아니라, 나는 누구에게 꼭 의미 있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나 자체로 의미 있고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내재화해야 했다. 사랑받기 위해 해왔던 낡은 행동을, 버림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내팽개쳐야 했다. 나는 누군가의 감정쓰레기통으로써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써 사랑받는 법을 배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