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진MUZN Oct 21. 2021

3-2. 왜 자꾸 제게 당신의 감정을 버리시나요?

2) 만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나

2) 만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나


① 왜 자꾸 제게 당신의 감정을 버리시나요?


20살 때 나의 별명은 ‘진대받이’였다. 진대받이란 ‘진지한 대화를 받아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학과의 많은 선배와 동기들이 내게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털어놓았었다. 당시의 나는 누군가 내게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털어놓는 것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 여겼었고, 나는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기꺼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었다. 그러다가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만 하는 사람들을 겪게 되면서 상처를 받게 되고, 내 의사소통 방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 기미가 보이는 사람에게는 선을 그으면서 나를 지키고 있었는데, 아예 처음 보는 사람도 내게 자신의 깊은 속내를 털어놓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나는 자각하지 못한 나만의 분위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이 부분을 상담가와 나누며 그 분위기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 일화는 기차에서 처음 본 아주머니들부터 택시기사 아저씨, 지하철에서 만난 할아버지 등 너무 많지만, 하나만 소개하자면 한 번은 SNS로 모르는 작가가 내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낸 적이 있다. 책을 한 권 읽고, 잘 읽었다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작가를 태그 해서 올렸는데, 작가로부터 감사하다는 디엠이 왔다. 나는 인사치레로 다음에 내 책이 출간되면 읽어달라고 했고, 7-8시간 후에 잊고 있을 때쯤 답장이 왔다. 답장이 늦어 미안하다 그런데 오늘 정신과 의사 때문에 화가 나서 병원을 알아보느라 늦었다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나는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공손하게 이 이야기를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답장을 신경 써줘서 감사하다고 하루 잘 마무리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그는 뜬금없이 자신을 담당했던 정신과 의사 욕을 내게 융단폭격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모르는 사이인데... 하고 생각했지만, 책을 통해 이 사람이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인지 알고 있어서 아주 조심스럽게 감정에 공감해주며 맞장구 쳐주었다. 이 사람의 불안정한 심리가 내게 튈까 봐 혹은 이 사람이 자살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한참 정신과 의사 욕을 정신없이 쏟아내는 그에게 나는 이 이야기를 멈추기 위해 적당히 중립적인 입장을 내놓았다. 그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본인도 잘한 건 없지만 의사도 잘한 건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 태도에 정신을 차렸는지 대화를 종료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또 내 감정을 배려받지 못함과 상대방의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한 감정을 대신 조절하려 용쓰는 행위로 인해 감정적으로 다쳤고, 결국 명상으로 내 마음을 안정시키고 잘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배운 심리학 지식들을 ‘사용’하는 건 이렇게 특수한 상황뿐이며, 이런 특수한 상황도 애정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거지 생판 모르는 사람과 겪고 싶은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이 상황을 변화시켜야 하는 건,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 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위험한 사람이 내가 쓰레기통 역할을 하지 않을 때 분노하는 것을 경험했기에 나의 안전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한 날, 학부 후배가 내 연락처를 물어왔는데, 후배가 선배의 연락처를 묻고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흔쾌히 나의 개인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선후배 간의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 예상했던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 후배는 나와 선후배 관계를 넘어선 다른 관계가 되고 싶어 했다. 나의 개인적인 심리상태를 안부 삼아 물어보기 시작했고, 나는 과도하게 선을 넘는 후배에게 계속 선을 긋다가 통하지 않자 연락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후배는 우리의 채팅룸에 누구도 묻지 않은 자신의 감정과 알 수 없는 공상들을 쏟아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입을 막을 수 없었고 손가락을 묶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답이 없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는 듯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생을 떠나고 새로 태어나겠다는 의미의 말들이었다. 나는 이 말이 자살을 암시한다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되었고, 고민을 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혹시 삶을 정리하고 싶다는 의미냐고 되물었다. 그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어 새로 태어나겠다는 말이라고 했다. 나는 이런 말을 늘어놓으며 나의 감정을 소모시키는 그에게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이런 연락을 그만해줬으면 좋겠다고 나는 당신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돌변하여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고, 나를 비난했다. 연락을 먼저 하지 않은 내가 잘못이고, 그런 나에게 자신은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을 뿐이라고 자신을 보호하고 나를 힐난했다. 다시는 내게 연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상담가에게 이 일화를 이야기하자, 나에게 감정을 쏟아내려는 사람을 단호하게 거절하면 상대방은 나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면서 내게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했다. 이번엔 비대면 상황이었기에 신체적인 폭력 사태는 없었지만, 운이 좋지 않은 경우 대면 상황에서 상대방이 폭력적으로 굴 수 있기 때문에 거절도 조심히 해야 한다고 하셨다. 다음에 또 유사한 상황을 만나면, 웃으면서 "지금은 제가 그런 여유가 되지 않아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하기 힘들 것 같은데 다음에 할까요?"라고 부드럽게 거절해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웃는 낯에는 침을 못 뱉지 않겠냐고 하시면서 말이다. 하지만 근본적이 문제 해결은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기에,  상담가와 나는 대체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가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했다.


   왜 사람들은 친하지 않은 내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걸까.

이전 10화 3-1. 괜찮아. 넌 이제 그 공포에서 벗어났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