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아이들은 그들을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② 아이는 흔쾌히 부모님의 감정쓰레기통이 된다.
상담에서 기본적으로 하는 작업은 현재의 상황과 유사한 과거의 상황을 떠올려서 내가 갖고 있는 행동 패턴을 형성하게 된 기원을 찾고, 그래서 유사한 상황에 반복적으로 처하게 되는 이유를 파악해보는 것이다. 상담가는 언제부터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냐고 물었다. 청소년기에는 친구들이 내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을 때 친구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좋았고, 그런 상처를 공유하면서 친구들과 더 깊어졌다고 이야기했다. 상담가는 그럼 가족과는 그런 적이 없었냐고 물었다. 나는 즉시 새엄마를 떠올렸다.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일 때 재혼을 했다. 나는 다른 친구들은 다 있는 엄마가 나만 없다는 열등감과 설움에 시달리고 있었고, 엄마라는 존재를 간절히 원했었기 때문에 새엄마가 생겼다는 건 나에게 너무 행복한 일이었다. 난 새엄마가 우리를 떠나가지 않기를 바랐고, 내가 예쁨 받을 수 있는 행동은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해서라도 엄마를 붙잡아 두고 싶었다. 내가 엄마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했던 행동 중 하나는 엄마의 진대받이 혹은 감정쓰레기통이 되는 것이었다.
엄마는 한편으로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결국 내게 완전하게 좋은 사람은 되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는 어른이었지만,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인간이었기에 종종 자신의 감정이 더 중요해지면 내가 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곤 아이가 감당하지 못할 좌절과 공포를 안겨주곤 했다. 엄마는 아빠와 극한 부부싸움을 한 뒤나 시부모에 대한 불만이 쌓일 때면 내게 와 아빠 욕과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욕을 쏟아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고생하고 있으며, 괴로운 지에 대해서 말했고 나는 엄마의 말을 경청하고,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엄마가 아빠에게 기대지 못하는 걸 나에게 기대서라도 이 가정을 떠나지 않기를 바랐고, 엄마가 하는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내가 들어줌으로써 엄마를 돕고 싶었다.
이때, 집안의 어른들도 그리고 나 스스로도 잊은 것은 어린 나의 감정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피를 튀기고 욕을 하며 싸울 때, 그런 폭력적인 장면에서 내가 입은 마음의 상처들을 어른들에게 기대어 치료 받아야 했던 나이에, 나는 나의 상처를 미루고 엄마나 다른 어른들의 상처를 먼저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날 떠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엄마를 비롯해서 할아버지나 아빠, 할머니가 나에게 기대는 것이 점차 당연해지고 나는 항상 착하고, 스스로 할 일을 잘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오는 착한 딸이자 손녀가 되는 것에 몰두했다. 아마도 은연중에 그것이 이 가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집 안에서 어른들의 감정을 더 배려하고 들어주던 습관을 길러오던 나는, 집 밖에서도 친구들의 감정을 더 배려하고 들어주게 되었고, 그게 오랜 시간 굳어져서 내가 가진 하나의 면모가 되고 상대방이 쉽게 마음을 열게 하는 분위기를 풍기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자신의 마음을 쉽게 열고 사적인 얘기를 털어놓게 된 것이었다.
상담가는 내가 만약 상담가의 길을 걷고 싶다면, 내가 가진 이 면모가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상담가를 목표로 공부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면모가 되고 있으니 나의 어떤 요소들에서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지 파악하고 그걸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다. 즉, 누군가 내게 마음을 열게 하고 싶을 때는 내가 가진 면모를 발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발톱을 숨기는 것처럼 나의 면모를 숨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계속 반복하게 하는 나의 역동은 엄마나 아빠를 돕고 싶었던 마음처럼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고 그걸로 나의 자존감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기에 이 역동 또한 알아차리고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역동이 자꾸만 상대방의 마음 깊이 파고들고 싶게 하고, 깊은 관계가 되고 싶게끔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관계는 결국 내가 버리고 싶은 부모님과의 상호작용 패턴을 현재에 다시 재현하게 되는 것이기에 그 역동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상담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입었던 옷을 벗자.”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알아야 벗을 수 있기에 내 옷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도 정해야 하는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