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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Nov 27. 2021

4. 행복하기 위해선 먼저 슬퍼해야 한다

부모를 대신하는 아이들

우리는 함부로 떼쓰지 않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며, 부모님을 잘 돕는 아이들을 보고 ‘어른스럽다’고 칭찬한다. 그러한 아이들은 자신의 나이에 맞지 않게 과도하게 의젓하거나 어른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또래에 비하여 정신적 성숙도가 높은 아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아이는 자신이 아이이기를 허락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이혼, 갈등 혹은 중요한 가족 구성원의 죽음 등 가정에 심리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이들은 책임감을 느끼면서 ‘부모화’가 일어나곤 한다(조은영, 정태연, 2005). 부모화(parentification)란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서로의 역할에 전도가 일어나는 걸 말하는데,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자녀가 부모의 양육자 역할을 맡게 되고 양육자 역할을 해야 하는 부모가 자녀에게 보살핌 받기를 기대하게 되는 현상을 칭한다(Boszormenyi-Negy & Spark, 1973).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보다 부모님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를 중재하고, 위로하고, 보호하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화된 아이들은 종종 우울증, 불안 등의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데(예, Kerig &  Swanson, 2010; Wells & Jones, 2000), 정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고통을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조은영, 정태연, 2004). 아이들이 자신의 고충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부모님이 힘들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자신의 힘듦까지 토로하면 부모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를 주게 될까 봐 배려하는 마음에, 혹은 어른스러운 행동을 했을 때 칭찬받았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감정을 억제하였기 때문일 수 있다.


    특히, 알코올 중독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인자녀(adult children of alcoholics)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알코올 중독 가정의 특정 자녀는 부모 혹은 배우자로서의 역할을 떠맡게 됨으로써 부모와 자녀의 역할이 전도되곤 한다(Goglia Jurkovic, Butt & Burge-Callway, 1992). 제리 모(2019)는 알코올 중독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믿지 않고(Don’t trust), 말하지 않고(Don’t talk), 느끼지 않는다(Don’t feel)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제안한다. 알코올 중독 가정의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않고, 느끼지 않는 것에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부모화’ 일 것이다. 부모화를 경험한 대학생들은 정서 표현을 하고 싶지만 하면 안 될 것 같은 양가적인 감정(정서표현 양가성)을 느꼈고, 그럴수록 우울 점수가 높았다(정호연, 2018). 부모화된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타인의 감정을 더 살피는 방향으로 성장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좋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면서 점차 정서를 느끼지 않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제하고, 느끼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성인이 되면 더 많은 심리적인 괴로움을 겪게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지 대상이 되어줄 수는 있어도 자신의 고통은 털어놓을 수 없어 혼자 외롭게 되고, 감정을 억제하느라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사람은 대인관계에서 자신의 정서를 관리하는 것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서 정서적 소진이 일어나고,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한 중요한 업무들에서 성과가 좋지 않을 수 있다.




나 또한 성인자녀(ACOA)로써, 감정을 억제했고 당연히 표현하지 않았으며,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법을 잘 몰랐다. 누군가와 아주 가까워져도 항상 선이 있었고, 사람들은 나를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지난 장은 상담을 통해 내가 알게 된 나의 대인관계 양상에 대한 고찰이었다면, 이번 장은 가장 중요한 나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상담을 통해 내가 평소에 감정을 어떤 식으로 다뤘고, 그 문제점이 무엇이었으며, 그래서 내가 내 감정을 안아주고 위로해줌으로써 다채로운 감정을 느끼며 점차 표현하게 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감정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항상 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엘리오에게 아빠가 위로해주는 장면을 떠올린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려고
마음을 잔뜩 떼어내다간
서른쯤 되었을 땐 남는 게 없단다.
그럼 새로운 인연에게 내어줄 게 없지.
그런데 아프기 싫어서
그 모든 감정을 버리겠다고?
너무 큰 낭비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싫어서 나는 계속 거부하고, 억제하고, 떼어내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 보니 긍정적인 감정마저 잔뜩 뽑혀버려 나도 모르게 점차 무미건조하고 외로운 사람이 되어갔다. 상담 선생님은 정반대는 같은 거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듯이, 모든 감정은 제각기 존재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힘든 감정이라도 떼어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느껴서 감정을 잘 소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래야 행복할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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