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진MUZN Nov 24. 2021

3-4. 불행 위에 지어진 행복

3) 덜 불행한 삶이 아닌 더 행복한 삶

아빠의 음주와 폭력성에 지칠 대로 지쳤던 나는, ‘술을 잘 마시지 않고, 다혈질이 아닌 사람이 좋은 사람이야’라는 편향된 인식을 갖게 되었고, 아빠와 반대되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설정하였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다정해 보이고 온순해 보이는 사람에게 끌렸었는데, 상담을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와 상처를 억제하고 다정하고 온순한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상담 선생님은 종종 이야기했다. ‘정반대는 사실 같은 거예요.’ 그들이 누군가를 속이고 싶어서 다정하고 온순한 얼굴을 했던 것은 아닐 거다. 그들 또한 누군가의 분노에 화를 입었었기에 자신은 그런 공격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온순한 양의 얼굴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게 더 맞겠지. 내가 아빠가 지닌 공격적인 성격을 혐오하고 반대되는 다정하고 온순한 특성을 가치롭게 여겨 따뜻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좋은 사람’을 ‘술을 안 마시고 다혈질이 아닌 사람’이라고 설정하는 것은 아주 편협한 인식이었는데, 세상에는 술을 좋아해도 알코올 중독에 걸리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다혈질이어도 그것을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권리를 찾는 것에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나는 ‘술을 안 마시고 다혈질이 아닌 사람’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는 나의 감수성과 공상들, 즐기는 영화와 책, 음악들, 그리고 향유하는 많은 가치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일 때 더 행복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아빠와 반대되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고 여겼는데, 그건 내가 ‘덜’ 불행해지는 방법이었지, ‘더’ 행복해지는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불행에서 도망치느라, 불행했던 것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면 삶이 나아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니었다. 덜 불행해질 수는 있었지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방식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이 불행과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이분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서, 그리고 불행을 기반으로 행복을 설계하던 습관에서 탈피해서, 나의 ‘행복’을 새롭게 건설해야 했다. 행복의 씨앗을 불행이라는 토양 위에서 심어서는 행복을 얻을 수 없었다.


    상담을 할수록 새로운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R을 밀어내야 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R을 밀어내야 하는 마음과 익숙한 것에 끌리는 마음이, 익숙한 관계를 통해 나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이 마음이 자꾸만 부딪쳐 마음이 시끌시끌했다. 나의 자아는 시끄러운 마음들 사이에서 버티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현실의 일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마음의 역동을 인식하고 있지만,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힘들어하는 나에게 상담가는 포르티아 넬슨(Portia Nelson)의 시를 읊어줬다.




1장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에 빠진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벗어날 수 없다.

내 탓은 아니야.

구멍에서 다시 나올 때까지, 시간이 한없이 걸린다.


2장

같은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을 못 본체 한다.

또 구멍에 빠진다.

믿기지가 않는다. 같은데 또 빠지다니.

하지만 내 탓은 아니다.

다시 나올 때까지 한참이 걸린다.


3장

같은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구멍에 빠진다...

습관적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본다.

나는 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당장 구멍에서 나온다.


4장

같은 길을 걷는다.

보도에 깊은 구멍 하나.

구멍을 피해 돌아간다.


5장

나는 다른 길로 간다.




    나의 과거 상태와 현재 상태 그리고 내가 앞으로 변하고 싶은 상태까지 모두 담겨있는 시였다. 나는 같은 구덩이에 몇 번 빠져봤다. 그리고 이제는 구덩이가 거기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습관적으로 그 구덩이에 빠지고 빠르게 빠져나올지, 아니면 그 구멍을 피해 돌아갈지 결정해야 했다. 아직 나는 다른 길로 걸어갈 만큼 마음이 튼튼해지지 않았지만, 구멍을 피해 돌아가는 선택은 내리고 싶었다.


    눈물범벅의 상담을 마치고 끊임없는 나 자신과의 결투로 넝마가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많은 눈물을 흘리고 나면 나는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어 조금은 더 힘이 생기게 된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R과 멀어지기로 한 결심이 더 곤고해졌고, 내가 밀어내는 속도에 비하여 그는 더 빠르게 멀어져 갔다.


     나는 구멍을 피해 돌아갔다.


     대신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이전 18화 3-4. 나는 그를 통해 아빠를 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