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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Nov 20. 2021

3-4. 나는 그를 통해 아빠를 본다

2)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R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한 번도 얘기해본 적 없는 그에게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의 눈빛과 목소리, 작은 움직임들까지 나의 무의식을 빼앗았는데, 그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볼수록 나의 끌림을 이해할 수 없었다. R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에 대한 마음이 더 커져만 갔고 그가 자주 꿈에 나왔다. 한 날은 그에 대한 생생하고 복잡한 꿈을 꾸었고 상담가와 함께 그 꿈을 해석해 보았다.  


    꿈속에서 나는 좀비들의 습격 소식을 듣고 R을 구하러 달려갔다. R은 담장 너머에서 자포자기한 채로 무너져있었는데, 나는 계속 그에게 돕겠다고 제발 너를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R은 죽고 싶다며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가 죽고 싶은 이유는 세상으로부터 특히 인간에게 상처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의 도움을 계속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나의 제안을 수락했는데, 하마터면 도와줄 수 없을 뻔했기에 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상담가는 R이 상처 받고 죽고 싶어 하는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꿈속의 R도 그리고 현실의 R도 내게 자신의 상처가 무엇인지 말해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꿈속의 R이 세상과 인간에게 상처 받았기 때문에 죽고 싶어 한다고 말했는데, 상담가는 내가 그렇게 해석해낸 이유를 궁금해했다.


    아빠였다. 이 아지랑이 같은 느낌을 따라 내려가 보니 거기에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세상과 인간에게 상처 받은 짐승과 같은 눈을 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가끔 그런 아빠가 내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아 주었으면, 그래서 내가 아빠를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아픈 마음을 떠올렸다.


    두 번째로 상담가는 내가 왜 자책했는가에 주목했다. 죄책감은 그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때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했다. 나에게 ‘책임감’은 ‘아빠’와 관련된 감정이었다. ‘너는 딸이니까 아빠가 네 말을 들을지도 몰라, 가서 아빠한테 술 그만 드시라고 말해 봐.’ 엄마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내게 항상 하던 말이었다. 당연히 아빠는 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술을 마시는 아빠는 아빠가 아닌 상태다. 그저 알코올 중독자일 뿐이었다. 알코올 중독자는 누구의 말도 듣지 못하는 상태라는 걸 어린 나도 우리 집의 어른들도 몰랐다. 나는 어른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아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빈번하게 노출되었고, 느끼지 않아도 될 좌절감을 느꼈다.


‘어른들이 아빠가 내 말을 들을 거라고 말한 건, 사랑하는 딸의 말은 아빠가 들을 거라는 가정이었겠지? 그런데 아빠는 내 말을 듣지 않는 걸 보면,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나는 추가적인 상처까지 받으며 가질 필요 없는 죄책감과 사랑받지 못한다는 슬픔, 왜곡된 인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었다. 어린 내가 겪었던 상처를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된다. 그때 울지 못한 어린 나를 대신하여 다 큰 내가 어깨를 떨며 울어야 다시 큰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울음이 잦아들자 상담가는 내가 R과 아빠를 유사하게 지각하고 있는 부분을 짚으며, 왜 아빠와 유사한 사람에게 끌리는 것 같은지 물었다.


    나도 정말 궁금했다. 나는 평생 아빠와 유사한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우울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데, 왜 자꾸만 아빠랑 닮은 우울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걸까. 세상에 다양한 우울 유형이 있는데, 나는 꼭 아빠랑 비슷하게 우울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답을 찾지 못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상담가는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와 실패한 관계를, 유사한 대상과 반복함으로써 이번에는 성공시켜보고 싶어 하는 욕구.”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너무 놀라 눈물만 방울방울 흘렸다. 내 마음이지만 나도 몰랐던 무의식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낯설지 않았다. 항상 내 곁에 있었던 익숙하고 친근한 얼굴을 한 마음이 사실은 나를 갉아먹는 괴물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아빠와 실패한 관계를 다시금 성공시켜보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떠오르자 마음이 칼에 베인 듯 아팠다. '그건 불가능해' 마음속의 또 다른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받아들여.'


    상담가는 내가 어릴 때 좌절된 상처를 치유하고 싶은 열망으로 이걸 치유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라 해석해 주었다. 그래서 아빠와 유사하게 지각되는 사람에게 끌리고, 그 사람이 나로 인해 치유되기를, 나와의 관계를 통해 치유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라 말하였다.


    상담가는 아빠에게 하지 못했것을 그에게 해주고 싶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실제로 내가 아빠에게 해주지 못했던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그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꿈에서도 그에게  도와줄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던 것이었다. 상담가는 관심과 애정은 나의 따뜻한 마음이고 좋은 의사소통이니까 좋은 것이지만, 문제점은 ‘나로 인해 치유되었으면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건 내가 과거에 행했던 딸로서의 역할을 다시금 재현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에서 문제가   있는 요소라고 했다. 예를 들어, 내가 그에게 아빠에게 하듯이 굴고, 그는 아빠가 내게 대하듯이 굴게 되는 . 새로운 관계에서 과거 아빠와 내가 했던 관계 방식을 재현하게 되는 것이 주의해야  부분이었다.


    R은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반복된 연애 패턴의 종합체였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예전엔 내가 같은 패턴에 빠지는지 모르고 반복했다면 지금은 그와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과거를 반복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상담가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해주지 않는다. 그 판단은 나의 몫이었다. 상담가는 그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고통은 유한하다.’ 같은 패턴을 또 반복하게 되더라도,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더라도 그 고통이 무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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