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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Oct 16. 2021

2-3. 뜯긴 마음의 모양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교내 상담을 받으면 절차상 몇 가지 심리검사들(문장 완성검사, MMPI 등)을 해야 하는데, 검사 결과가 꽤 심각하게 나왔는지 사전상담을 담당하시는 상담자분이 근심 어린 눈으로 검사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MMPI 검사는 내담자의 성격과 현재 심리상태를 알려주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임상 척도 중 하나다. MMPI 검사지에는 나의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 상태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다행인 것은 내가 갖고 있는 원래의 성격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거였다. 엉망인 상태로도 가끔은 평소처럼 사람들을 만나고, 공부를 하고, 실험실 미팅을 소화해내며 지내고 있었던 것은 다 그 덕분이었던 것이다.


    아빠 꿈 얘기를 들은 상담가는 내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게 느껴진다고 했다. 주변에 이야기할 상대가 있냐고도 물어봤다. 나는 그런 존재들이 곁에 있지만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 몰라서 별 말은 못 했고, 다들 그저 곁을 지켜줬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날 쪼으지 않고 풀어줬다고.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억지로 생각을 정리하려고 시도하거나 하지는 않으며 지냈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집중력이 많이 저하된 것이었다. 상담가가 기말 과제할 때 엄청 힘들었겠다고, 지금 과제하고 집중하고 그럴 상태가 아니라고 했다.


    상담가가 복잡하고 거대한 마음이라서 쉽게 들여다보기도 힘들고 함부로 꺼내기도 힘들었을 거라고 했다. 그냥 탁 보여 주고 말아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는 게 마음이니까. 지금 건드리는 것도 위험하니까 안전한 상황에서 풀어나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내 감정들을 조금 접어 넣으셨다. 상담이 시작되기 전까지 마음 들여다보지 말고, 괜찮아지려고 하지 말고, 그냥 지금처럼 흘러가는 대로 지내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잘 자고 밥 잘 먹고, 여력이 된다면 애도의 시간을 가지라고. 너무 힘들면 약물치료도 받아보라고 했다. 운동해야지, 청소해야지 같은 억지로 뭘 하려는 생각도 금물이라고. 그냥 쉬라고 했다 편하게. 게으름을 허락받았다.


    아버지랑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는데, 그 대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고. 이전 상담에서는 현실 속에서 아빠와의 관계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런 문제들을 다뤘다면 이제는 아빠와의 것들을 갈무리하고 보낼 것은 보내고 남길 것은 마음속에 남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했다.


    왜 우는지 눈물이 왜 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겨우 그치고 나왔다. 이렇게 내가 나를 모르겠을 때가 있었나. 하지만 알려고 하지 않았고 앞으로 당분간 알려고 하지 않아야 하는 시기였다. 가끔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야 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문의 길에 들어서면서, 나도 부서질 듯 열심히 살며 이루고 싶은 어떤 것이 있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다 부서져서 다시 부서진 듯 살 수가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다시 부서질 듯 살아가려면 원래의 형태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상담을 받고 교수님께 찾아가, 휴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교수님께 상담가가 해줬던 이야기들을 말하며 나의 상태를 고백했다.


    내가 기대했던 교수님의 반응은 따뜻한 위로였고, 쉴 수 있도록 학업적인 부분에서 배려해주시길 바랬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교수님은 분노에 휩싸여 나를 다그치시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공부를 놓으면 안 되는 거라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교수님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내겐 그 질책이 이 상황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나를 향한 것 같아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불이 되어 나에게 꽂혔다.


    교수님의 반응에 너무 섭섭하고 당황스러워 엉엉 우는 나에게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하셨다.


    “네가 나중에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어. 이럴 때일수록 공부를 해야 하는 거야.”


    결국 휴학을 할 수 없었고, 교수님은 혹시나 내가 다른 마음을 품을까 많은 미팅과 과제, 발표를 던져주시며 쉴 틈을 주지 않으셨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울면서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해내는 것뿐이었다. 가정을 잃은 내가, 실험실이라는 또 다른 울타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

    

    교수님의 지도로 공부를 놓지 않았기에 나는 '공부하는 나'를 잃지는 않을 수 있었지만,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계속 나를 몰아붙였고, '감정을 느끼는 나'는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내 학업의 발목을 잡는 방해꾼으로 취급하면서,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올라올 때마다 강제로 나에게서 떼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정말 괜찮아진 것 같기도 했다. 다시 공부를 했고, 사회생활을 하며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때쯤에 상담센터에서 내 차례가 왔다고 상담을 받겠냐고 연락이 왔고, 나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기에 상담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앞으로 더 괜찮아 질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계속 새로운 과제를 던져줬고, 나는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지금까지 습득한 방식대로 계속 뜯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떼어내지 지도, 이겨낼 수도 없는 감정들이 나를 집어삼킬 때면, 나는 나약하게 태어난 나를 저주하며 괴로워했다.


    "이렇게 감정에 휩싸이는 나는 어쩌면 공부의 길과 맞지 않을지도 몰라."


    다시금 나는 공부하는  너무 힘들어졌고, 중요한 업무들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고, 결국 자기효능감을 잃고, 삶의 행복감을 잃어버렸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도려내고, 거부하는 것에 너무 많은 힘을 쏟은 나머지 목표를 향해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사람이 갖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에너지를  배분해서 사용해야 했는데, 나는 공부를 하기 위해 감정을 통제하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도리어  결과로 공부에  에너지가 없어지게  것이었다.


    마음이 뜯긴 자리에 새살이 돋아날 틈도 주지 않고 나는 계속 마음을 뜯어냈다. 너덜 해진 마음은 점차 이상한 모양이 되어갔다. 내 마음이지만 나도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술을 마셔도, 여행을 가도, 친구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도, 이상한 모양의 마음이 얼마나 더 이상한지 확인되기만 했다.


    뜯긴 마음은 점차 즐거움을 느끼는 마음도 뜯어냈다. 마음의 잡초만 뜯어내야 했는데, 아픔에 눈먼 나는 예쁜 꽃나무도, 희귀한 야생화도, 모조리 뽑아냈다. 나는 그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게 내 마음은 누구도 살 수 없는 사막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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