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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Oct 13. 2021

2-2. 우울은 도망치는 나를 기다린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영원히 도망칠 수 없다


방학이 되고, 나는 두문불출하며 집에서 고구마처럼 뿌리내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억지로 밝게 나를 꾸며내야 했는데, 현재 감정 상태와 다른 나를 꾸며낼 때면 스스로가 어색하고, 사회가 어색하고, 현실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를 자꾸만 숨기고 싶었다. 아빠가 나의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였는데, 그 새로운 세상에서 숨 쉬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숨 쉬는 법도, 밥 먹는 법도, 사람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방법도 다 잊어버리게 되었다. 나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종종 나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려고 노력했지만, 외출 준비를 하는 것도 나에게는 큰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우울한 상태의 존재는 극심한 슬픔 혹은 미칠 듯이 공허해서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그 두 가지 상태만 허락받는다. ‘무감’해져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삶이, 생명이,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는 평화로운 상태가 절망적인 상태였다. 나는 내가 어떤 걸 좋아했는지, 무엇을 싫어했는지, 공부를 어디까지 하다가 멈추고 장례를 치르러 간 것이었는지, 학문을 통해 어떤 것을 알고 싶었는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이었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우울은 나의 존재를 지우고, 삶을 지우고, 감정을 지웠고, 내가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본능적으로 꼬르륵 거리는 위장이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자주 무시하고 끼니를 거르곤 했다.


    나는 아빠가 죽었다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아직 이 현실에서 ‘나’로 존재할 수 없다고, ‘나’로써 이 현실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현실이 진짜인지 모르니까,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이' 현실이 아니니까, 내가 살던 '그' 현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런 나의 상태는 생생한 꿈으로도 등장했다.

 

    난 꿈속에서 새엄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다. 그런데 새엄마가 전화를 안 받고 어떤 남자가 받길래 난 새엄마의 새로운 배우자라고 판단했다. 나는 새엄마가 나의 존재로 인해 곤란할까 봐, 딸이 아닌 척 업무의 일환으로 전화를 한 것처럼 연기를 하면서 그분에게 새엄마를 바꿔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 남자분이 "해진아, 왜 엄마 찾아. 아빠가 있잖아."라고 말했다. 놀라서 번호를 확인하니 내가 실수로 아빠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아빠 돈 벌려고 잠시 떠난 거야. 엄마 찾지 마, 아빠가 곧 갈게, 기다려 줘." 난 아빠에게 "우린 아빠 죽은 줄 알아, 아빠 장례식도 했어."라고 했다. 너무 놀랐다. 아빠는 아니라며, 잠시 떠난 거라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망신고도 다 했는데 어떻게 하지? 하며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면서 일단 근처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들에게 가려고 움직였는데, 길을 잘 못 들어서 비행기 활주로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경비행기에 치여서 CT를 찍으러 병원으로 이송되는 와중에 알람 소리에 꿈에서 깼다.


    생생한 꿈에서 깨어나서, 나는 '아빠가 아직 살아 있구나, 잠 좀 깨면 할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말해야겠다.'라고 진지하게 생각하곤 아빠가 살아있다면 처리해야 할 행정적인 일들을 정리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있었는데, 꿈에서 깨어날수록 진짜 아빠가 살아있나?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 이건 꿈이었어.'라고 바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의 사고에 의심을 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가며 아빠가 살아있지 않다는 걸 재검토하는 거였다.


    내가 치러냈던 현실의 장례식과 아빠가 살아있다는 꿈속의 사실을 비교하다가, 마지막에 아빠 입관 장면이 떠올랐다. 아빠 돌아가셔서 반듯이 누워있는 걸 내 눈으로 봤었지. 봤었어... 점차 이 모든 것이 그저 꿈이라는 것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이걸 받아들이는 데 걸렸던 나의 시간과 방황들이 너무 충격이라서 '아, 아직도 못 받아들이는구나. 거짓말이길 바라는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너무 현실적인 감정이 반영된 꿈이었다. 아빠가 죽기 직전까지 벗어나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딸들이 엄마처럼 자신을 떠나서 혼자될 까 봐 걱정하는 두려움, 두 딸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그런 아빠의 감정들이 너무 절절히 느껴지는 목소리였기에, 나는 마음이 찢어질 듯했다. 아빠가 죽어서도 편치 못한 것 같아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내가 결국 꿈을 통해 도망쳐있던 감정을 마주하면서, 내가 망가져가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도저히 여기서 나아지는 방법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상담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기댈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만큼만 타인에게 기댈 수 있었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은 나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돌봐주지 못했다. 나의 슬픔을 내가 바라봐주지 않는데, 타인에게 기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한 날은, 밥을 먹는데 박사 선생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다.

    “무진 씨는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잖아요. 물론 물어보면 어느 정도 대답은 해주지만, 물어보기 전엔 말을 잘해주지 않고. 예전에 저는 미리 상대방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맞춰서 행동을 해왔는데 이제는 그런 것보다도 대화를 통해 서로가 어떤 걸 원하는지 이해하고 그에 맞춰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대답을 듣고 싶은 건 나는 당연히 무진 씨가 어떤 상태인지 가늠할 수 없고, 얼마나 힘들지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무진 씨에게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그런 얘기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선배가 부담스럽지 않게, 애정과 걱정을 담아서 해주는 말을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 감각을 잃었던 날들과 다시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현실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는 지금까지의 감정들이 빠르게 흘러가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밥 먹는 동안 생각을 정리해서 실험실로 돌아가며 내 생각을 얘기했다.

    “저는 남 앞에서 우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어떤 일을 얘기하기 전에 그 일로 인해 울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담담해졌다고 생각이 들어야 남 앞에서 얘기를 꺼내고,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혼자 간직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먼저 말 안 하는 거기도 하고, 선배가 먼저 물어보면 당연히 말은 하지만 감정을 충분히 풀어내지 않고 축소해서 말할 때도 있죠. 지금 선배에게, 그리고 실험실 식구들한테 원하는 게 있다면 제가 방황하고 떠돌아다니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주고 있고 돌아왔을 때 저를 평범하게 대해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지금도 그렇게 대해주고 계시고 그래서 아직은 뭘 더 원하거나 필요한 일은 없어요.”


    선배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가 개방할 수 있는 선에서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다. 본인이 아니라도 교수님에게라도 꼭 마음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교수님도 기다리고 계실 거라고.


    나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는 슬픔과, 기대고 싶다는 애타는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결국 나는 관성처럼 예전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더 본질적으로는, 내가 상담을 통해 배운 것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수 없었다. 과거의 일을 털어놓고 기대는 것은 가능했지만,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나는 다시 익숙한 방법을 택했다. 감정을 느끼지 않고, 누군가에게 기대지도 않는 건 결국 과거의 나였다.


    혼자 공부를 하려고 논문을 읽을 때면 미칠 것 같고 속이 터질 듯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결국 감정에 압도되어 현실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래된 습관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시 상담을 찾으라는 전임 상담가의 말을 떠올리며 절박한 마음으로 교내 상담을 신청하러 갔다.

이전 05화 2-1. 결국 술은 아빠를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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