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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Oct 09. 2021

2-1. 결국 술은 아빠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았다.

처음 받았던 상담이 끝나고 약 2년 뒤, 나는 심리학 대학원에 입학한다. 석사 1학기. 나는 처음 맞이하는 공부의 강도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날도 어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밤새 발표 준비를 하다가 멘탈이 나가서 잠시 눈을 붙였던 평범한 하루 중 하나였다. 익숙한 이른 아침, 피곤에 찌든 나를 깨운 건 할아버지의 전화였다.


    “너희 아빠 죽었다. 이것아.”


    할아버지의 말투는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게 나만의 일인 것처럼 말하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그 상황에서도 남 탓을 하고 싶어서 내게 어쩌려고 그러냐며 타박했다.


    내가 무엇을 어쩔 수 있었을까.


    아빠는 자신의 몸이 버틸 수 있는 만큼 술을 마시다가,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 술을 그만 먹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패턴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전과 다르게 술을 마시는 기간이 너무 길어졌고, 나는 이미 쇠약해진 아빠가 왠지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들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겨서 절박한 심정으로 정신건강 복지센터에 연락해 아빠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도움을 구했다.


    다음날 방문하겠다는 담당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안심했다. 내가 아빠를 설득해서 치료기관에 데려갈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는 돈이 아깝다고 그리고 스스로 이겨내면 되는 거라고 치료의 필요성을 이해해주지 않지만, 가정에서 할 수 없는 조치를 국가에서는 취해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집을 방문했던 담당자는


 ‘아버지는 만나길 거부하셔서 만나 뵙지 못했어요. 그런데 무진 씨 집이 못 사는 집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도움은 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경제적 상황으로 판단하는 것에 충격을 먹었다. 내가 기대한 것은 아빠에 대한 설득이나 보호자에 대한 설득이었고, 적절하게 치료할 수 있는 병원과 연계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 시골에서 어떻게 치료를 받는 게 좋을지 이 막막한 현실에 해답을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환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보호자를 만나보지도 않고, 그저 집을 둘러보고 가면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무책임한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담당자가 방문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는 며칠 뒤 나에게 이런 전화가 왔다.


“그 사람들이 쌀 한 포대 두고 갔더라. 우리 집은 벼농사지어서 쌀도 필요 없는데.”


   우리가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왜 쌀 한 포대를 두고 간 걸까. 헛웃음 짓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말도  되는 복지제도에 그저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그냥 아빠가 죽었으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를 떠나는 건 상상도 한 적이 없었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를 원망하는 할아버지의 전화를 끊고, 일단 중요한 책임자들에게 나의 상황을 알렸다.


    “선배,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연락을 받고 당황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나는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아빠가 죽었다.”라는 상황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내가 가장 많이 사용해온 '분리'를 또 사용한 것이다. 나는 감정을 분리시켰고, 감정을 느끼는 시간을 미뤘다. 그리고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감에 더 집중했다.


    알려야 할 사람들에게 모두 알린 뒤, 나는 내가 탈 수 있는 가장 빠른 기차를 예약하고 간단하게 짐을 싸서 고향으로 갔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당시에 동생이 사귀던 남자 친구가 나를 데리러 와있었다. 나는 뒷좌석에 앉아 아빠와 함께 달렸던 도로를 아빠 없이 달리며 그제 서야 아빠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걸 실감하기 시작했다.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데리러 오던 건, 항상 아빠였으니까.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쏟아졌던 것은 할아버지와 삼촌의 원망과 질책이었다.


    “오라고 했는데, 왜 안 와. 아빠는 네가 죽인 거야.”


    속으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병원비가 아깝다고 아빠를 내버려 둔 할아버지가 죽인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무시하고 지나쳐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내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나의 슬픔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상주로써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생각했고 그걸 열심히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할아버지는 이 잔치의 호스트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과 시끄럽게 떠들고, 내 친구들과 농담 나누고, 사람들을 흉보며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할아버지는 내게 비난을 해댔는데, 지긋지긋해진다 싶을 때 막내 삼촌이 할아버지를 막아섰다.

    

    “아부지예. 아들한테는 그러지 마세요. 차라리 저한테 하세요. 아들 마음의 상처는 평생 갑니다.”

    할아버지는 더 이상 나에게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삼일 간의 장례를 끝내고 나서도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성격 급한 할아버지는 아빠와 관련된 것을 모두 빨리 처분하고 싶어 했고, 나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사망신고, 상속, 세금 업무, 자동차 거래 등을 해냈다. 내 삶에 슬픔을 끼어넣을 공간도, 자유도 없었다.

    

    많은 서류들이 마무리되었을 때, 나는 도시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들어서자마자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잠식시켰다. 나는 감정에 압도되어 침대에 뿌리내렸고, 온종일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감정의 총체가 말도 안 되게 거대해서, 나는 이게 어떤 감정인지 하나씩 볼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저 감정에 짓눌려 겨우 숨만 헉헉 몰아 쉴 수 있을 뿐이었다.


    학교로 돌아갔을 때 학기는 1달 정도 남아있었다. 슬픔을 미뤄가며 겨우겨우 수업을 마쳤지만, 당연히 엉망진창이었다.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고,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도 눈물이 왈칵 솟아올라 몰래 울곤 했다. 사람들 앞에서 익숙하게 해내던 밝은 척도 괴로운 일이 되었다. 과거에 상담을 하고 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힘들다, 슬프다 등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 강도의 슬픔과 고통은 태어나서 처음이라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힘든 지 스스로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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