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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Oct 02. 2021

1-2. 상담가를 믿는 것에도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본질에 접근하기

    상담 기관에 방문해서 심리검사를 하고, 상담을 등록한 지 2달 만에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빠의 알콜중독 및 부모님의 이혼이 나에게 영향을 줬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상태였다. “내 가정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는 이미 스스로 다 이해하고 인지하고 있어. 지금 내가 힘든 건 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무기력과 우울에서 극복하는지 모르는 거고, 그걸 알고 싶어서 상담을 신청하는 거야. 나는 그 방법만 알게 되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스스로를 판단했다.


    나중에 심리학을 더 공부하며 알게 되었지만, 위와 같은 사고방식과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방어기제 중 ‘분리’에 해당한다. 사건과 그 사건이 주는 감정을 분리하고, ‘그 사건’이라는 사실관계만 받아들이고 그 사건이 내게 주는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 절친한 친구들에게 가정사를 이야기할 때도 “우리 부모님 이혼하셨어, 지금 엄마는 새엄마야.”라고 말하며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인 듯이 굴었는데, 그건 내게 “나 오늘 김치찌개 먹었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무게의 발언이었다. 사실은 그 일이 나에게 큰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분리해서 하나의 객관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감정과 사건을 분리하고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상담이 바로 잘 진행되지는 않았었다. 상담가는 이런 나를 보고 ‘감정의 동요 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도 다 무진 씨의 모습이에요.’라고 말해주며 격려해주었고, 함부로 내 감정을 파헤치려고 하지 않았다. 감정을 오랫동안 분리해왔기에 나는 내가 감정을 느끼고는 있는지, 그리고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상담가의 따뜻한 지지 아래에서 나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내 감정과 생각을 구분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지만, 점차 나의 흘러가는 의식을 붙잡고 그 속에 일어나는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일에 숙련되어가고 있었다. 내 마음에 집중을 해서, 이 감정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원망인지, 억울함인지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고 그 감정들을 꼭꼭 씹어 소화해 넘겼다. 소화하지 못하고 체해서 속에 가득 담긴 감정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나는 8회기 동안 상담가에게 아빠가 알콜중독이라는 핵심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분리해왔던 것도 알콜중독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겉에 드러난 결과만 수습하느라 바빴다. 왜냐하면 나는 가정환경이 나에게 영향을 줬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정환경이 나에게 영향을 줘서 현재의 내가 형성이 되었다는 생각은, 내가 열심히 현실과 싸워가며 만들어낸 나의 자아를 부정하는 위협적인 일이었다. 또한 어릴 때부터 알콜중독 가정에 대한 선입견을 많이 겪어왔기 때문에, 아직 어떤 사람인지 믿을  없는 상담가에게 나의 콤플렉스를 개방할  없었다.


    교내 무료상담은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개인 당 10회기로 정해져 있었는데, 10회기를 하는 동안 문제의 원인이 아닌 문제의 결과로 인한 현재의 상황을 늘어놓았고, 7-8회기에 종결이 거론될 때, 나는 이제 다 괜찮아진 것 같다고 종결 작업을 시작해도 될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 당시에 다뤘던 문제는 친구관계와 더불어 내가 완벽한 이상향을 두고 나를 채찍질하며 몰아붙이는 성향에 대해서 다뤘었는데, 사실 이 문제들의 근간에는 아빠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수면 아래의 것들은 보지 않고 위에 떠오른 몇 문제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었다.


    2회기를 남겨두긴 했었지만, 내가 더 하고 싶다면 10회기를 더 연장할 수 있는 상황에서 아빠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엉엉 울었고, 내 감정의 동요에 내가 놀라서 연장을 해야겠다고, 상담가에게 아빠 문제를 털어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나는 이 문제를 혼자 잘 다루고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영향을 너무나도 많이 받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결심을 한 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상담가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처음으로 아빠 문제와 그 영향력에 대해 직면하게 되었을 때 나는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전보다는 강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유된 것은 아닌 마음들과 앞으로 또 어떤 상처가 생길지 알 수 없다는 불안함. 사랑으로 넘쳐나던 마음이 급격히 쓸쓸해지고 냉담해지기도 하는 격동들. 이 모든 것이 넘쳐흘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빨리 상담가를 만나기를 기다렸다.


    상담가 앞에 앉자마자 봇물처럼 말과 감정이 쏟아졌다. 나는 그때까지는 그 사건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에 꽤 시간이 많이 걸렸나 보다. 상담은 원칙적으로는 한 회기 당 50분으로 정해져 있지만, 이 날엔 상담가가 2시간 내리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다 이야기했고, 진이 빠지도록 울었고, 상담가는 나의 보폭에 맞춰서 함께 걸어주었다. 나의 불행에 대한 억울함, 슬픔, 분노, 서글픔, 절망감... 하나씩 느껴도 힘들 감정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몰려왔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럽다. 철들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저는 그게 칭찬으로 들리지 않아요. 특히 어른들은 내가 왜 어른스러워져야만 했는지, 내가 왜 내 나이답지 않은지 먼저 걱정해줘야 했지 않나요? 어떤 일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걸 먼저 봤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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