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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MUZN Oct 06. 2021

1-3. 슬픔을 게워낸 공간에 사랑을 담았다

첫 상담을 종결하다.

당연히 종결은 물 건너갔고, 1년 2개월 동안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하면서 매일 울었다. 지금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나의 슬픔들을 마주하고, 내 마음속에 묻혀있던 슬픔들을 다 눈물로 게워내야 했다. 한 번은 하염없이 우는 나를 상담가가 진심으로 안아줬던 기억이 난다. "무진 씨, 한 번 안아주고 싶네요. 여기까지 살아오느라 고생했어요." 나는 그 말에 울며 말했다.


“지금까지도 살아내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힘들까 너무 무서워요.”

    나는 나의 미래가 상처와 고통의 연속일 것이라 예상했다. 인생은 고통이라고 단정 지었고, 그걸 이겨내고 버텨내는 힘을 단련하기 위해 상담을 받는 것이라 판단했다. 당연히 불행을 가정한 삶은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지만, 친구들의 사랑과 상담가의 보조로 조금씩 일어설 수 있었다.


    1년 2개월 동안 상담을 하면서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마음속에 존재하던 날이 사라졌다는 거다. 나를 베고 남을 베던 그날을 치우고 나니까, 나도 마음이 편하고 다른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엔 내 슬픔을 가리기 위한 웃음을 지었다면, 상담을 받고 나서는 정말 진심으로 행복해서 웃는 날이 더 많아졌고, 흑백사진 같던 일상이 알록달록한 수채화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면증도 사라졌다. 나를 자책하는 생각도, 누군가를 원망하는 생각도, 미래를 불안해하는 생각도 내 마음속에서 멀어져 갔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내 마음을 전하고 친구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으면서 내 마음에 자리를 마련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었다. 우울한 내면의 나와 사회적으로 드러난 밝은 나를 분리시키고, 우울한 나를 가둬두고 핍박하던 나는, 나의 슬픔을 안전한 사람에게 드러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상담을 받으며 충분히 용기가 생겼을 때, 나는 처음으로 친구들에게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울며 말했고, 나의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의 마음을 바탕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를 형성할 수 있었다.


    G에게 “나는 날 많이 사랑해주지 않아서, 누군가 날 사랑해주면 좀 더 격하게 감동하는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 G는


“그래, 그러니까 네가 그만큼 널 사랑해줄 때까지 내가 널 사랑해 줄게.”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상담을 하면서 원했던 내 모습 중 하나는, 아빠가 술을 먹고 집에 일이 터져도 내 할 일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는 것이었는데, 그 목표도 상담을 하면서 이룰 수 있었다. 어김없이 아빠가 술을 먹고, 나에게 집에 와서 아빠를 설득해 달라는 무책임한 전화가 오고, 나는 고향에 올라가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일을 책임지려 하며 마음을 다치는 일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시험 기간 중에는 혼자 울면서 공부를 하던 날도 있었다. 텍스트에 집중해야 하는데, 자꾸 떠오르는 마음들이 괴로워 집중할 수가 없었고 공부를 너무 놓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의 약속을 위해 놓지 않으려고 울면서 억지로 공부를 마쳤던 날이었다. 고통스럽던 그 학기에 나는 처음으로 4.5를 받았다. 성적이 나오고 상담가에게 내 성적을 말하며 또 엉엉 울었다. 나는 그 학기의 성적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증표로 여긴다.  


    상담가랑 종결 회기를 하면서, '무진 씨, 기억나나요? 10회기 정도 했을 때 무진 씨가 다 괜찮아진 것 같다고 종결해도 된다고 했던 거? 여기까지 온 것도 다 무진 씨가 한 거고, 괜찮아진 것도 다 무진 씨가 해낸 일이에요. 하지만 지내다 보면, 관성처럼 과거의 습관화되어있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상담에서 어떤 작업을 통해 괜찮아졌는지 기억해서 스스로 노력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상담을 다시 시작하면 돼요.'라고 말해줬다.


    상담가는 내가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변화하려는 에너지, 나를 되돌아보는 에너지,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에너지. 쉬운 일이 아닌데, 나는 자동적으로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긍정적인 말들을 모두 가슴에 담으면서, 그리고 내가 변화한 것들을 직접 느끼면서, 앞으로 힘든 일이 생겨도 나는 다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내 생의 첫 상담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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