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pybara Feb 12. 2022

팔둘레 안의 이야기-향수

'잠뿌'를 아시나요?

냄새에 민감한 편이다. 악취를 맡으면 기절한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만 냄새에 따라 이것저것 좌우된다.

우선 기억이 그렇다. 어떤 순간에 인상 깊은 냄새를 맡으면 그 순간은 쉽게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을 때면 기억이 또렷이 떠오른다. 장작 타는 냄새를 맡으면 일곱 살 무렵 가족과 함께 갔던 안면도의 풍경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오이 비누 냄새를 맡으면 할머니 집 화장실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사람도 냄새로 기억하는 편이다.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좀약 냄새로 기억되는 사람도, 강아지 냄새로 기억되는 사람도, 본인만의 체취로 기억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제일 구별하기 쉬운 건 아무래도 향수 냄새다. 쓰는 향수 냄새에 따라 그 사람의 색깔이 머릿속에서 공감각적으로 결정된다. 돌체 앤 가바나 라이트 블루는 하늘색, 딥디크 필로시코스는 선홍색, 이런 식이다. 나에게 향기는 그만큼 힘이 강하다.


나로 치자면 옅은 갈색과 푸른색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냄새를 좋아하는데,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좋은 냄새가 나면 기분이 좋아서 향수를 자주 뿌린다. 거기에다가 향수를 하나 둘 모으다 보니 사백, 오백 미리가 되었는데 유통기한까지 있어, 더 열심히 뿌린다. 나만의 향수 루틴이 있다면 일어나서 두 번, 자기 전에 두 번이다. 아침에는 집을 나서기 직전에 양쪽 목에 한 번씩 뿌린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말이다. 내 루틴이 특별해지는 건 집에 돌아온 이후다. 잘 준비를 다 마치면 손목에 한 번씩 뿌린다.

시간에 따라 뿌리는 위치가 달라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맡는 사람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침에 뿌리는 향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냄새를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코의 높이에 가까운 목에 향수를 뿌린다. 하지만 자기 전에 뿌리면 맡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맡으면서 자기 좋게 손목에 뿌린다.


너무 독하지 않은 향수를 뿌리고 잠자리에 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냄새를 맡느라 호흡이 깊어져서일까? 사실 자기 전에 향수를 뿌리는 사람은 마릴린 먼로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마릴린 먼로는 죽었으니, 나만의 흔치 않은 루틴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잠뿌'라는 단어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향수 정보를 찾다가 우연히 들어간 네이버 향수 카페에서 만난 단어, 잠뿌. '잠자기 전에 뿌리기'의 준말이다. 아예 전문 용어가 있었다. 회원들끼리 잠뿌용 향수를 서로 추천하고 추천받는 모습을 보며 나만의 특성이 아니었구나, 괜히 실망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 동시에 침대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손목에 코를 대고 잠을 청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든다.

작가의 이전글 팔둘레 안의 이야기-강아지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