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꽃시장에 조금은 낯선 얼굴이 등장한다.
바로 헬레보루스다.
크리스마스 즈음에 꽃을 피운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로즈’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꽃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화사한 꽃과는 거리가 멀다.
초록빛, 와인빛 같은 빈티지한 색감을 띠고, 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자칫 시든 것처럼 오해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겨울 초입에 헬레보루스를 만나면 괜히 반갑다.
꽃대의 선이 전형적이지 않고 자유로워, 센터피스에 꽂아두면 은근히 우아한 기운이 번진다.
헬레보루스의 꽃말은 ‘나의 불만을 진정시켜주세요’라고 한다.
묘하게 계절과 잘 어울리는 말 같다.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된다.
새해에 세웠던 다짐을 떠올리면 마음 한편이 괜히 작아지는 순간이 있고,
그 작은 마음에 다시 불안이 살짝 스며든다.
나의 불안은 늘 마음속에 있다.
상황에 따라 크기가 달라질 뿐,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잔잔한 물결처럼 작은 울림으로 머물다가도,
또 어떤 날은 파도처럼 커져 나를 집어삼킬 듯 달려든다.
오늘도 그랬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겉도는 기분이었다.
안정되지 않은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니, 가끔은 이 길이 맞는지, 나의 고집인 건지,
현실에 타협해야 하는 건 아닐지 두려운 생각도 고개를 든다.
그럴 때 문득 헬레보루스가 떠오른다.
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제 계절이 되면 어김없이 피어난다.
화려하지도 않고, 크게 주목받지도 않으며,
때론 시든 것이 아니냐는 오해와 질책을 받지만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또 나처럼 헬레보루스의 우아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꽃이 돌아오는 겨울을 기다리며 반갑게 맞이한다.
그렇듯 누군가는 질책하더라도, 누군가는 사랑해준다.
우리도 그렇다.
어떤 자리에서는 모자람을 지적받을 수 있지만, 또 다른 자리에서는 분에 넘칠 만큼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어쩌면 그 사랑이 질책을 덮을 만큼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또 나의 불안을 잠재워본다.
여전히 불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질책에 주눅들 필요도, 사랑에 오만할 필요도 없다는 걸.
언젠간 결국 나도 나만의 계절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작은 믿음을 붙잡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