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주는 위로 , 퇴사일기

by 시절화


누구나 마음속엔 사직서 하나쯤은 품고 산다.

나 역시 그랬다.

언젠가를 대비해 책상 서랍에 조용히 숨겨둔 종이 한 장,

그것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탈출구 같은 것이었다.


모두가 나를 지켜보는 듯한 시선, 어중간한 자리에 끼어버린 듯한 불안,

미래의 가능성을 계산하느라 정작 오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기분 속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벚꽃이 만개하던 계절,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승진했고 연봉도 올랐다.

남들이 보기엔 화려한 타이틀과 안정적인 자리를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달랐다. 그 순간조차 공허했고, 행복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결국 나는 꺼내기조차 두려웠던 사직서를 내밀었다.

“더 나은 시작을 위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불안이 몰려왔다.


그 무렵 우연히 본 드라마 스타트업의 한 장면이 오래 남아 있다.

계약직이던 여주인공이 연장 제안을 받았을 때,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깨닫는다.

더 높은 층으로 가려면 지금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과감히 내린다.

그 장면이 내 마음을 그대로 비춘 듯했다.

나 역시 더 높은 곳, 더 나다운 길을 위해 멈추고 내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퇴사는 단순히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아니었다.

익숙한 자리를 떠난다는 건 곧 내 정체성과 습관, 그리고 세상이 나를 바라보던 방식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을까.”

그 질문이 너무 무겁고 선명해서, 오히려 그동안의 내가 얼마나 나를 외면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돌아보면 늘 새로운 변화가 있었지만 올해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왔던 내가, 처음으로 멈춰 서서 나를 마주한 해였다.


누군가는 퇴사를 용기라 하고, 누군가는 도망이라 말한다.

하지만 퇴사는 그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결국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나는 가족들에게 장난처럼 “나 좀 쉴 거야”라고 말했지만, 그 속에는 간절함이 숨어 있었다.

쉬고 싶다는 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고백이었고, 동시에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 달려야 하고 언제 쉬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배웠다.


가을은 내게 그 배움을 가르쳐주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건 끝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가지가 비워져야 다시 꽃이 피듯, 나도 내려놓아야만 새로운 길을 볼 수 있었다.

퇴사가 내게 남긴 건 상처와 공백만이 아니었다. 그 빈자리에서 비로소 자존감을 회복할 기회가 찾아왔다.


혹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음속에 사직서를 품고 있다면,

혹은 이미 그 길을 걸어 나왔다면,

부디 힘들었다고 말해도 괜찮고, 잠시 멈춰 서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정말 수고했다.


가을의 바람처럼 스스로에게 쉼을 허락한다면, 언젠가 봄도 다시 찾아올 것이다.


퇴사는 끝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 주어진 가장 솔직한 전환점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두렵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 조금씩 새로움을 배워가고 있다.


잎이 지고 난 자리에 꽃이 피듯, 우리 역시 다시 피어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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