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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Aug 30. 2019

엄마라서 무능해

초보 엄마의 거창한 변명

"순산하고 오거라.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출산휴가를 간다고 회사 전체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한 상사에게서 이런 메시지가 왔다. 이 사람뿐만 아니라 이런 부류의 응원 메시지를 꽤 여러 사람에게서 받았다. '순산하세요', '엄마가 된다니!', '멋지다, 파이팅' 등.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한다. 진통 시간이 어찌 됐든,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그 모든 산고를 이겨내고 한 생명을 이 세상에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위대한 어머니'는 일종의 고유 명사가 되었다. 어머니가 되는 순간, 우리는 위대한 존재가 된다.


대부분의 '위대한 이야기'는 신화로 일컬어진다. 위대한 어머니도 신화가 됐다. 그 개념이 너무나 숭고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되어, 신화에 도전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고는 했다. 모성애 이데올로기의 탄생이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모성애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꾸준히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의 책 '모성애의 발명'에서 저자는 모성애라는 이미지가 전달하는 자기희생과 절대적 헌신의 이미지가 18~19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산업혁명과 근대화로 노동의 분업화가 일어나면서 남성은 바깥사람, 여성은 안사람이 됐다고 말한다. 즉 남편은 사회에 나가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 오는 사람이, 아내는 가사를 맡고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역할로 고정됐다. 가장, 아버지를 뜻하는 영어 단어 'breadwinner' 역시 19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어머니가 가장 역할을 하는 경우 'women(female) bread winner'라고 굳이 명시하기도 한다.


이는 근대화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은 농민이거나 가내 수공업을 했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구성원들은 노동과 가사를 공동으로 분담했다. 예컨대 농민 집안이라면 어머니도 농사를 지으러 나가야 했기 때문에 아이를 돌보는 업무는 조부모나 친척들이 함께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현모양처 개념이 유교의 산물로 인식되고 있지만, 학계(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유교문화연구소 비교사상연구실 등)에서는 1900년대 일제의 교육 정책으로 정착한 이데올로기로 보고 있다. 물론 고려, 조선 시대에도 이상적인 부인상(象), 아녀자상이라는 게 있었으나, 이는 여성의 품행과 관련된 것이지 '위대한 어머니'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일본에는 '양처현모' 개념이 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에 '유아를 생육하는 것이 가장 큰 공이다'라는 식으로 확산했다. 이 같은 일본의 사상 역시 근대 유럽의 여성교육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메이지 시대 교육가인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1875년 3월 발간된 '명륙잡지(明六雜誌)'에서 '최상의 어머니를 얻는다면 최상의 아이를 얻을 것이며 일본은 최상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성애를 비난하거나 반박하려는 게 아니다. 나 역시도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모성애가 봇물 터지듯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물론 내 생각과 무의식까지도 지키려고 노력했다. 우울한 감정이나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이 생각과 감정을 몰아내고자 의지를 갖고 의식을 환기했고 식상한 말이지만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려주려'고 애썼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도 나의 산후조리는 일단 접어두고 아이와 스킨십을 강화하며 세상에 적응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출산 후 아이와 2m 이상 떨어져 있던 시간은 잘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에 2시간이 넘어간 적이 없다. 모성애가 이데올로기라고 할지라도 실제로 아이에 대한 사랑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명백하게 아이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라고 호소하고 싶어서 거창한 변명을 늘어놔봤다. 그래, 사실 나 역시 그냥 어딘가에 칭얼대고 싶었을 뿐이다.


위대한 어머니가 되고 싶었는데 되지 못하고 있다. 초산, 초보 엄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절망적이다. 젖도 똑바로 물리지 못하고 이모님이나 남편 없이는 똥 기저귀 하나 갈지도 못한다. 똥 기저귀 한번 갈고 엉덩이 씻겨주려고 했다가 양쪽 손목은 밤새 통증에 시달리고 관절마다 핫팩을 붙이고 지낸다. 아직 애가 신생아인데도 이 정도인데 무게가 더 늘어나면 나는 어떻게 하나. 망연자실이다.


아기가 얼굴이 빨개지고 숨이 넘어가도록 우는데 나는 아이 하나 제대로 달래지도 못한다. 내 품에 안겨서 죽을 듯이 울던 아기가 이모님이나 남편 품으로 넘어가니 갑자기 순한 양이 된다. 20분도 지나지 않아서 새근새근 잠이 든다. 오호통재라. 어머니라는 자격이 과연 내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일순간 인생 자체에 무력함을 느꼈다.


카뮈는 노동자들이 시지프의 신화 속에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나는 노동자로서의 삶이 낭만적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다.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가 주어진다.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가.


너무나 예쁜 아기와 너무나 반복되는 삶이다. 아기를 기쁘게 하겠다고 나는 열심히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지만 이내 그녀는 배변으로, 배고픔으로, 졸림으로, 기타 여러 이유로 자지러지게 울며 내 바위를 산 밑으로 굴려 떨어뜨린다. 육아가 하루하루 거듭되면서 매일 새롭게 나의 무능함을 깨닫는다.


위대한 어머니라는 잣대에 나는 무능한 인간이 됐다. 그래서 나는 '위대한 어머니'라는 주장을 근대화의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할 것이다. 어머니는 위대하지 않다. 순간순간 절망하고 또 아이로 인해 기뻐하는 한 인간일 뿐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위대하다고 속박하지 말라. 위대해지고 싶지만, 육아는 노력만으론 쉽지 않다. 매일 좌절하고 매일 깨지고 매일 무력함을 느낀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초보 엄마를 받아들여 달라. 나는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주고 싶은 어머니이지, 위대한 어머니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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