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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Sep 21. 2019

이토록 불친절한 산부인과

'아니 그래서 왜 하는데' 미리 설명 좀 해주세요

산부인과에서 '그건 왜 하나요?'라는 질문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우리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방식은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출산, 육아 서적을 몇 권이나 읽었지만 어쩌면 아이를 낳는 과정에 대한 부분은 무의식적으로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성경에서는 걸핏하면 '해산의 고통'란 비유가 나오는데 도대체 해산이 얼마나 끔찍하면 이리도 자주 나올까 싶다. 그 고통을 겪기 전부터 미리 알고 싶진 않단 내 무의식이 출산 과정에 대한 학습을 거부한 게 아닐까.. 하는 궤변부터 늘어놓고 시작한다.


출산 과정에 대해 알아보려고 기껏 하는 일은 맘카페, 블로그에서 출산 후기를 찾아보는 것 정도였다. 이렇게 찾아보면 제목에 꼭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무통 O/관장 O/회음부 절개 O'


이런 식의 제목이다. 무통 주사를 맞았고, 관장과 회음부 절개도 했다는 얘기다.


'그런가 보다' 했다. 아프지 않으려고 무통 주사를 맞고, 아기를 낳기 위해 힘을 주다가 봉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변을 먼저 처리해놓고, 아기가 나오다가 찢어질 수도 있는 회음부를 미리 절개해 놓는다는, 아주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고 크게 이상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무통 없이 어떻게 애를 낳아요'

'그냥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차라리 제왕절개를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이런 얘기들이 임신 기간 내내 주변에서 가장 많이 했던 조언들이다. 어떤 누구도 엄마와 태아가 출산 과정에서 겪는 호르몬 상호 작용이나 아기가 태어날 때 겪는 고통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다. 특히 무통주사는 마치 신줏단지 같이 여겨지며, 쌩으로 출산하겠다고 했다가는 괴짜 취급을 받는다.



이렇듯 나는 처음부터 출산에 관해 굉장히 무비판적이고 게으른 태도를 보였다. '이게 좋다카더라' '다들 이렇게 한다카더라' 하면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그놈의 맘카페.


임신 후기에 이르고, 산부인과에서 르봐이예 출산이라느니, 회음부 열상 주사를 맞을 거냐느니 물어보는 통에 드디어 내 뇌가 출산이란 과제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내 뇌는 온통 '좋은 태교' '출산 으악 아프겠다' 등으로만 차있었을지도 모른다.


몇 가지 키워드가 뇌에 입력되고 나서야 드디어 나는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무통 주사는 정말 천국 문을 열어줄까?

회음부 절개는 왜 하나?

관장, 제모가 꼭 필요한가?

태아 심음 검사는 계속해야 하는 건가?


등등. 임신 초기부터 총 네 곳의 산부인과를 다녔고 만난 의사는 5명 정도다. 이제 막 개원한 원장님 한 분을 빼고는 어느 누구도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포털 검색만 하면 나오는 답변 정도였다.


알려주지 않으니 찾아보는 수밖에.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데, 알고 하면 두려움이라도 줄겠지. 일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던 중 남편이 어디선가 자연주의 출산이라는 개념을 들고 왔다.


30주가 지나서야 우리는 이 출산 방식을 알게 됐다. 동시에 자연주의 출산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출산 동반자 가이드(페니 심킨 저)'를 수학의 정석 보듯 뜯어보며 이 사상과 방법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자연주의 출산은 출산 과정에서 인위적인 의료 개입은 최소로 하는 출산법으로 일반적으로 자연 출산 과정에서 사용되는 분만 촉진제(인공 옥시토신), 내진, 관장, 회음부 절개, 무통주사, 제모 등을 권하지 않는다. 그 바탕에는 의료진의 편의에 따른 출산이 아니라 산모가 출산 과정에서 주도권을 갖는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의 출산은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다는 믿음 정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신체는 이미 가장 최적의 방법으로 번식할 수 있게 준비되어있단 얘기다.


무통 주사는 자연주의 출산에서 일차적으로 배격되는 방법 중 하나다. 태아와 산모는 호르몬으로 상호작용을 하는데, 무통 주사를 맞으면 진통과 소강기에 나오는 호르몬 교환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아기가 겪게 되는 고통이 배가될 수 있다는 이유다. 진통 소강기에는 엔도르핀 분비가 많아져 산모와 아기의 스트레스가 크게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무통 주사를 맞으면 산모는 진통을 덜 느끼는 대신 진통 소강기에 엔도르핀 호르몬 분비도 감소한다. 이에 아기는 오히려 더 고통을 느끼게 된다. 또 산모가 진통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아기가 나오고자 할 때 힘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결국 출산이 지연되는 일도 생긴다. 산모는 무통 천국을 포기하는 대신 남편과 조산사 등의 도움을 받아 진통을 버틴다. 짐볼이나 냉온팩, 스쿼트, 편안한 음악 등을 활용하는 방법도 사용된다.


회음부 절개도 최소로 하고 있다. 회음부 절개는 아기의 머리가 나오면서 질 입구가 찢어질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잘라 놓는 의료 행위다.


동양인은 머리가 서양인보다 크기 때문에 회음부 절개가 더 필요하다고는 한다. 그렇다 해도 자연주의 출산에서는 회음부 절개 대신 몇 주간에 걸쳐 회음부 마사지를 해 미리 산문(産門)을 넓혀놓는 방식을 택한다. 실제로 회음부 마사지를 할 경우 절개를 아주 최소로 할 수 있어 산후 회복이 빠르다.


태아 심음 검사나 내진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아기를 무리해서 꺼내려는 행위도 없다. 산모는 자연스럽게 진통을 버티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게 된다. 간호사가 배를 눌러 아이를 내보내는 푸싱(pushing)이 없다 보니 회음부가 무리할 일도 없고 찢어짐도 적다.


제모도 출산 미스터리 중 하나다. 위생상 하는 거라고 하는데 뭐가 불결하고 비위생적인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의사 편의를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된다.


산부인과에서 권하니 '그냥' 하는 일들에 하나씩 대답하다 보니 '이걸 꼭 해야 하나'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아기도 목숨을 걸고 세상에 나오는데 나 혼자 편하자고 무통을 맞아야 할까. 분만 촉진제로 나의 출산 주도권이 화학물질에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출산 행위에서 산모와 아기의 주권은 얼마나 되는가.


그래서 나는 출산 계획서를 나름대로 적어보았다. 자연주의 출산에서는 일반적이지만 보통 다른 산부인과에서는 하지 않는 일이다. 회음부 절개를 최소로 해달라고 요청하고, 무통주사는 맞지 않겠다고 했다. 진통이 오더라도 최대한 늦게 병원에 가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양수가 터져 급하게 가는 바람에 인공 옥시토신이 한차례 내 혈류를 타고 흘렀지만 자연주의 출산을 모방하는 게 아예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먼저 우리 부부는 예정일 2-3주 전부터 꾸준히 회음부 마사지를 했다. 실제로 그래서 아이를 낳는 과정에서 회음부 절개는 거의 하지 않았다. 절개를 최소로 한 영향인지, 신체 전반적인 회복도 빨랐다.


무통주사를 맞지 않겠다는 포부는 무산됐다. 하지만 남편이 자궁 근수축 측정기를 계속 확인하며 진통 주기마다 초(秒)를 세줬고, 나는 거기에 맞게 배에 힘을 줄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남편이 옆에서 도와준 덕분에 무통주사를 맞지 않은 산모처럼 힘주기가 가능했고 나는 실핏줄 터짐이나 회음부 열상 등의 외상을 거의 입지 않았다.


또 르봐이예 분만을 택해 아기가 나올 때 조명을 어둡게 해서 자궁과 비슷한 환경으로 만들어주고, 낳고 난 직후에 캥거루 케어를 할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랬지만, 제대로 진통이 시작되자 단 한마디만 뇌를 지배했다.


'차라리 죽고 싶다. 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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