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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사 Nov 05. 2019

모유수유를 하며 나는 술꾼이 됐다

"와 오늘 콩나물국 장난 아니다. 소주랑 먹으면 마시면서 술 깨겠네."

"여보, 감자전 너무 맛있다. 딱 막걸리 안주야."

"요즘 같은 가을 날씨에는 OOO호텔 바에서 한강 보며 칵테일 한잔 하면 딱인데."

"(친구한테) 우리 아기 보러 놀러 올 때 와인 한 병만 사다 주라."


요즘 내가 이따금씩 뱉는 말이다. 모두 가정형이다. 소망이 담겨있다. 12개월 가까이 알코올이라고는 요리할 때 맛술 정도 냄새만 맡으니 별소리를 다하게 됐다. 이런 것이 금단 현상인가.


모유수유를 하며 나는 술꾼이 됐다. 저런 말을 할 때마다 남편이 비웃는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나는 소주 한잔, 맥주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만취 상태가 되는 이른바 알코올 쓰레기다.   마시고,  마신다는 이유로 직전 직장에서는 사수한테 찍히기도 했다.  못난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꽤나 곤욕을 치렀다. 지금 회사에서는 '술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악을 쓰고 마셨다. 마시고 토하고 마시고 토하고가 매일 반복되던 삶이었다. 게다가 이번 사수는  동네에서 유명한 술꾼. 낮술부터 밤술까지 주말 빼고  7 이상  약속이 있는 사람이었다. 낮술도 최소 2 이상은 마신다는 얘기다.


"술은 대체 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어. 술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라고 매일 같이 울부짖던 삶이었다.


그런 생활을 몇 년간 하다가 결혼과 함께 술 약속이 급격히 줄었다. 임신을 확인하고는 아예 없어졌다. 한 달에 서너 번씩은 저녁 약속에 나가서는 다른 사람들이 고주망태가 되는 꼴을 묵묵히 지켜봤다. CCTV가 된 기분이다. 나쁘지 않았다. 인간이 술에 취하면 저리 추해지는구나. 하나도 웃기지 않은데 저렇게 웃는구나. 그들에게는 5분의 시간이 나에겐 1시간처럼 느껴졌다.


알코올 프리의 삶이 너무 좋았다. 매일 우아하게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뱃속의 아기와 교감하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누고 태교를 위한 독서도 한다. 임산부 요가도 나가고 남편과 밤 산책도 한다. 평화 그 자체다.


임신 기간에는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태다.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가끔 술을 마신다는 임산부 얘기를 듣긴 하는데, 그럴 배짱은 없다. 술은 내 세상에 없는 존재였다.


출산을 하고 나니 얘기가 다르다. 분명 나는 술을 마실 수 있는데 마시지 않는 상태가 됐다. 모유수유를 시작해서다. 모유만 먹이지 않으면 음식의 자유도 커진다. 예전처럼 뭐든지 먹을 수 있다.


모유수유를 선택한 이상 식이요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알코올은 물론, 기름진 음식이나 인공 조미료, 밀가루 음식도 최대한 식단에서 배제한다. 야채는 비자발적으로 유기농만 먹게 됐다. 아기를 낳기 전보다 훨씬 엄격한 상태다. 태아 상태에서는 뭔가 내 몸과 탯줄이 필터가 되어 아기에게 갈 거 같았는데 이제는 아기가 젖 먹는 모습을 눈으로 보니까 좀 더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느낌이랄까. 그런 느낌적인 느낌 때문에 쉽게 일탈을 하지 못한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삶이 때때로 억압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면 술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화덕에서 나온 피자, 영롱하게 빛나는 갓 구운 빵, 주말 오후 간식 떡볶이 등 즐겨 먹던 소소한 즐거움들이 마비 상태가 된 게 답답하다. 술은 극단적인 사례고.


모유수유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그냥 음식은 다 먹어도 된다고 하는데, 모유와 가슴에 문제 한번 생기면 쫄보가 되어서 먹으래야 먹을 수가 없다. 한 번은 일주일 내내 식빵에 크림치즈를 올려 아침을 먹고 저녁에는 고기반찬으로만 먹었다. 며칠 후에 가슴에 멍울이 잡히기 시작했고 아기가 수유를 할 때 엄청 짜증을 내며 몸부림을 쳐댔다.


며칠 버텼을까. 젖량이 줄었다는 느낌에 이상해서 가슴 마사지하는 곳을 찾았다. 유구염이라고 한다. 유두 쪽에 수포가 생기고 유선에 찌꺼기가 쌓여 젖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 정도면 너무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어요?"아팠다. 바늘로 가슴을 포 떠내는 느낌이다. 너무 아파서 수유하고 난 다음에는 가슴을 움켜쥐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냥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사장님이 숙련된 손으로 쌓인 젖을 빼냈다. '따끔~'이라며 유선에 낀 찌꺼기를 빼내 보여준다. 1mm도 되지 않는 유선을 막을 정도로 충분히 큰 찌꺼기였다.


"요즘 기름진 거 많이 드셨어요?"


정곡을 찌른다. 단백질은 아기에게 좋은 거 아니냐고 물었는데 단백질도 단백질 나름이라고, 지방은 최대한 먹지 말라고 한다.


비자발적인 채식주의자가 됐다. 고기도 먹기는 먹는데 예전처럼 입안이 육즙으로 흘러넘쳐 낯빛까지 기름지게 되는 상태로는 먹지 않는다. 끼니마다 샐러드를 사발에 담아서 먹고 고기 대신 가능하면 달걀과 두부로 단백질 보충을 한다.


유난 떤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내 몸이 이런 걸 어찌하겠는가. 내 몸은 양질의 모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격한 식이요법을 요구하는 몸인걸. 하도 잘 먹어서인지 요즘은 아기가 아주 즐겁게 맘마를 먹는다. 오늘도 엄마로서 잘 해낸 느낌이다.


아기에게 모유를 주는 이상 엄격한 식이요법은 계속될 거다. 그리고 말로만 술꾼인 상태도 계속될 거다. 일종의 대리 만족이랄까 여우의 신 포도랄까. 사실 술이 주는 효용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기분 좋게 한잔 걸쳤을 때의 흥은 다른 어떤 음료도 줄 수 없다. 아쉬운대로 말로만 마시는 술도 나름대로 정취와 재미가 있다. 술에 취하지도 않고 속도 아프지 않으면서 그 분위기와 맛을 느낀다. 온갖 음식을 먹어보며 여기에 어울리는 술을 상상해본다. 가상의 풍류를 즐기는 중이다. 나 같은 알코올 쓰레기에겐 아주 딱이다. 건배~!



Photo by Adam Jaime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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