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 이후로 내 손의 자유는 아기에게 귀속됐다. 과장하면 내 몸의 주인이 아기가 된 거나 마찬가지다. 아기도 신체의 자유가 나한테 달려있다. 악어와 악어새요 흰동가리와 말미잘이다.
아기를 안았다 내려놨다, 내려놓고 아기와 놀 때면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인다. 곤지곤지 잼잼 짝짝쿵에서부터 인형 놀이, 딸랑이 놀이까지. 혹은 남편한테도 못해주는 마사지를 아기에게 해준다. '쭉쭉쭉 쭉쭉쭉' 의성어는 배경 음악이다. 마사지 모드에 전원이 켜지면 엄마 입에서도 쭉쭉쭉 음악이 나온다. 아기의 청각 발달을 위해 엄마는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내 몸의 모든 기관이 아기를 위해 존재한다.
구원 투수로 등판한 친정 엄마는 나에게 하루 4시간 자유를 줬다. 아니 사실 같은 공간에 있고 수유를 해야 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답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운동도 하러 갈 수 있게 됐다.
처음으로 운동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아기를 충분히 먹인 후 심기일전하며 현관을 나섰다. "엄마 잘 부탁해!"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처음으로 아기와 2시간 넘게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 눈에 밟힌다. 아기는 내가 어딜 가는지 알았는지 벌써부터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라고 눈빛으로 호소한다. 으윽. 이걸 외면하고 나는 나서야 한다. 나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휴직 기간 내내 저 눈빛의 종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미안하다 아가야. 너의 희생이 필요하다.
출산을 했을 때는 한여름이었는데 어느덧 경량 패딩을 챙겨 입을 만한 날씨가 됐다. 푸르뎅뎅했던 나무들이 지금은 울긋불긋 물들었다. 잔디에 떨어진 낙엽마저 버진로드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바닥에 으깨진 은행 열매에서는 구린내가 코를 찌른다. 그 구린내가 아기 대변 냄새처럼 느껴진다.
이어폰에서는 오래간만에 동요나 클래식이 아닌 라운지 힙합과 락밴드 음악이 나온다. 고등학생 때 한참 듣던 그웬 스테파니 훌라백걸이 나온다. 10여 년 전 감성을 살려 흥얼거린다. 주머니에 손도 찔러 넣고 말이다. 철은 대체 언제 드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있노라니 새삼 이 감촉이 생경하다.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본 게 언제였을까. 늘 아기와 함께 다니기 때문에 유모차를 끌거나, 아기띠를 매고 엉덩이를 손으로 받치고 있는다. 갑자기 주머니 속의 내 손이 너무나 소중하다. 계속 그렇게 주머니 안에서 손을 꼬물 거리기도 하고 가만히 두기도 하면서 손의 감각 그 자체에 집중한다.
횡단보도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이번에는 짝다리를 짚어봤다. 짝다리는 아닌데 괜히 한번 비뚤어져본다. 스스로 느끼기에 불량하기 짝이 없다. 귀에서는 계속해서 한물간 힙합과 록음악이 울리고 있다. 내가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음악이니 족히 10년은 지났다. 아 요즘 노래도 나온다. 마이클 잭슨의 러브 네버 필 소 굿. 하 이게 요즘 노래라니 나도 진짜 아줌마 다 됐나 보다.
그렇게 나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가을 하늘 아래서 내리 걸었다. 몽고반점보다 시퍼런 하늘에 빨간 단풍이 아기 볼기짝을 상기시킨다. 우리 아기 그러고 보니 기저귀 갈 때 되진 않았을까. 대변 못 봐서 울고는 있지 않을까. 집에서 나온 지 20분 만에 아기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니 대체 왜 벌써?!
결국 나는 운동하러 가서는 내내 엄마한테 카카오톡을 보냈다. 아기 자? 아기 뭐해? 아기 잘 놀아? 안 울어? 등등. 이전엔 1시간 반씩 하던 운동을 50분도 안되어 끝내고 나왔다. 심지어 1km 거리를 택시 타고 돌아간다. 몸은 1km 밖에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거실에 깔린 아기 매트 위에 있다. 이렇게 엄마가 되나 보다. 손의 자유, 시간의 자유, 몸의 자유가 없어도 아기 옆에 있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인가 보다. 아무렴 주머니에 혼자 찔러 넣은 손보다는 보들보들한 아기 손을 잡고 있는 게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