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 4개월 차에 만난 A는 벼랑 끝에 있었다. 그의 생일이라고 만났는데 계속해서 얼마나 회사가 힘들고 거지 같은지 토로했다. 듣다 듣다 사회생활을 그래도 2년 더 많이 해본 나는 '야 원래 회사가 다 그래'라고 되지도 않는 위로를 했다. 얌전한 얼굴이 경찰한테 걸린 노점상 아주머니처럼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조그마한 입술에서 한마디 튀어나왔다.
"(심한 욕) 네가 겪어보지 않았으면 닥쳐."
아 그도 욕을 할 수 있는 친구였구나. 울먹이는 A가 짠하다.
A는 홍보대행사 신입 사원이었다. 일종의 자기 멸시와 무력감으로 멍든 상태였다. 하는 일마다 다 엉터리 취급을 당하고 선배들은 '이런 식으로 할 거면 차라리 다른 일을 찾아봐라'라고 매일같이 쪼아댔다. 신입 사원이니까 못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정말 무능력하고 이 곳에 맞지 않는 걸까 늘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신입 치고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지금 들어간 회사도 1년의 백수 생활 끝에 겨우 들어간 곳이었다.
고약한 그의 선임들은 자신의 클라이언트나 기자들을 절대 A에게 소개해주지 않았다. '우리가 너 밥까지 떠먹여 줘야 하니?'라며 선을 그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A의 팀장은 '넌 기본적인 것부터 똑바로 해라'라며 모든 업무를 앗아갔다. 성과라고 낼 것도 없었다. 선배들이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해도 벅찼다.
배수진 치고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보도자료도 제대로 못 만든다는 지적에 주말에는 신촌에서 글쓰기 강좌를 듣기까지 했다. 거기서 친해진 언론사 지망생들한테 자기가 쓴 글을 첨삭받기도 하면서 말이다. 나이는 몇 살이나 더 많았지만 그리 창피하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기사 스크랩도 먼저 해놓고 야근할 일이 있으면 자처해서 했다. 그렇게라도 인정받고 살아남고 싶었다. 그만 두기에는 자신이 너무 패배자가 되는 것 같았다.
위로해줄 수 있는 말도, 조언이라고 해줄 말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기운 내라며 케이크 하나 더 사주고 집에 가는 길에 택시비 쥐어주는 것 말곤 해줄 게 없었다.
그로부터 5개월쯤 지났다. 이번엔 우리들의 송년회 자리였다.
A가 입사한 지 9개월쯤 지났을 때다. 그의 표정이 전보다는 밝다. 몇 개월간 성실한 모습을 어필하다 보니 선배들이 슬슬 인정해주는 눈치라고 한다. 그해 마지막 회식자리. 팀장은 A에게 '넌 이제 원상복귀다. 열심히 해봐.'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A는 클라이언트 약속도 먼저 나서서 잡아보고, 주변 지인을 동원해 애당초 홍보를 하지 않는 곳들도 연결해 자기 고객으로 만들기도 했다. 신입치고는 발군했다. 주변에서는 상전벽해라며 감동했다.
그러다 보니 선배들도 슬슬 A에게 일을 주기 시작한다고 한다.
"선배들이 일을 준다는 게 떠넘기는 건 아니지?"
그래도 사회생활 조금 더 했다는 친구가 먼저 물었다.
"아냐 뭐 같이 하고 팀에 도움되면 좋은 거지."
아 순진한 어린 양이여. 정말 팀에 도움되면 좋은 걸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데.
A는 이듬해부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팀장의 최애 사원이 됐다. 팀장은 공공연하게 'A한테 맡기면 돼'라며 그에게 점점 많은 임무를 줬다. A는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에 날아갈 것 같았다. 출근길이 행복했다.
팀장과 선배들은 기자들을 만나는 약속마다 A를 데리고 나갔다. 5일 출근하면 최소한 4일은 저녁 약속이 있었다. A는 담당 업권에서 모르는 기자가 없어졌다. 심지어 타 업권 기자들까지도 만났고 또래 모임도 만들었다.
그런 생활을 3년 정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팀에서 자료를 만드는 사람은 A밖에 없어졌다. 약속을 잡는 사람은 A밖에 없었다. 선배나 팀장들은 A가 잡은 약속에 숟가락만 얹을 뿐이었다.
입사 후 3번째 생일에 다시 만났다. 그는 자신감과 불만이 동시에 차있었다. 모든 업무를 자기한테 떠맡긴다는 이유에서다. 일이 몰리는 건 둘째 치더라도 자신의 과업까지 선배들 공으로 돌아가는 데에 치가 떨린다고 했다.
"저번에 팀장이 뭐라는 줄 아냐? 'ㅇㅇ아. 내가 이 연차에 일을 해야겠니?'라고 하더라. 그 말 듣는데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어. 미친 거 아냐 진짜?"
표정 관리를 못 했다면서도 그는 결국 '네 그럼요 팀장님'이라고 상냥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도저히 할 말이 없어서 평소에 하던 말을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내가 쓴 보도자료를 그날따라 정말 많은 매체에서 써줬거든? 그런데 회의 시간에 팀장이 '제가 쓴 보도자료가 이번에 좀 괜찮았나 봐요' 이러는 거야. 내가 썼는데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럽게 말할 수가 있지?"
그때부터 A는 자기가 쓴 보도자료, 만난 사람들, 업계 스터디한 내용 등을 빼곡히 정리해 워드 파일에 표로 만들어 기록했다. 퇴사의 순간, 전사 메일로 모두 보내겠다고 마음먹고 말이다. 마지막 열에는 그 일을 시킨 '담당자' 즉 그의 선배 이름을 적어놨다. '그 새끼가 일도 안 하고 나한테 맡겼다'라는 얘기다.
A는 오늘도 열심히 팀 몫을 해내고 있다. 자기 능력이 쌓여 언젠간 더 크고 알려진 회사로 이직할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때 저 판도라의 상자도 윤봉길 의사의 물통 폭탄처럼 던져질 것이다.(주.윤봉길 의사가 던진 건 물통 폭탄이며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이었다. 던지지도 못한 채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한국 언론사와 미국, 일본 언론사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누가 일을 많이 하느냐에 있다. 미국 언론사에선 소위 짬 좀 찼다는 기자들이 백악관, 국무부 프레스룸에 앉아있다. 대통령 브리핑에서도 긴장하지 않고 자신의 관록에서 나오는 촌철살인의 질문을 던진다. 주요 부처일수록 기자 경력이 오래된 이들이 배치된다. 나이가 어려도 경력은 상당한 사람들이 많다. 현재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단 회장인 ABC 뉴스의 조나단 칼은 1962년생으로 내일모레 환갑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연배의 기자는 이미 사장쯤 하고 있다. 로이터에서 26년간 근무한 짐 울프 기자는 내내 미국 국방 관련 기사만 담당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직접 종군 기자로 가기도 했다. USA 투데이의 경우 속보팀 기자들 평균 경력이 15년이라고 한다. 가장 바쁘게 뛰어다녀야 하는 현장에 우리나라로 치면 차장급 기자들이 배치된다.
일본 언론의 경우에도 상급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취재에 임한다. 주니어 기자들이나 업무 보조 직원들은 퇴근 시간이 되면 적당히 알아서 집에 가기도 한다. 책임이 큰 자리에 일도 많다. 내가 일했던 NHK 워싱턴지국의 지국장도 1962년생, 당시 쉰이 넘었다. 평소에도 가장 늦게 퇴근하고 허리케인 샌디로 모든 교통이 끊겼을 땐 아예 지국에서 숙식하며 기사를 준비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쉰이 넘으면 적어도 부장, 혹은 편집국장 정도로 현직에서 물러나 있는 자리다. 직접 쓰는 글은 데스크 칼럼 정도일까. 그마저 안 쓰는 경우도 있다.
한국 언론사에서는 신입 기자가 들어오면 사회부부터 배치한다. 수습 때부터 경찰서를 돌며 '사쓰마와리'라는 걸 한다. 사쓰마와리는 일본어로 경찰서의 찰(察,사쓰)과 돌다(回り, 마와리)의 합성어로 사실 언론계에서도 뿌리 뽑아야 할 은어다. 여튼 이 사쓰마와리는 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그날그날 벌어진 사건 사고를 취재하는 힘겨운 작업이다. 입사한 지 3년이 되지 않은 어린 기자들의 경우 대부분 사회부로 간다. 명분도 확실하다. '젊어서 굴러야 기자의 기본기를 다진다.' 기자 업무가 거칠고 힘들기 때문에 가장 고된 출입처부터 하라는 의도다.
이런 문화 때문에 연차가 찰수록 기자 생활도 쉬워진다고 말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차장쯤 되면 기사 안 써도 돼'라고 얘기를 하는 철면피도 있다.
해외 특파원에 대한 개념도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특파원은 보상 개념이 어느 정도 있다. 회사에서 이만큼 공을 세웠으니 몇 년 해외에서 좀 쉬다 오라는 식이다. 반면 미국이나 일본은 연차에 관계 없이 그 나라에 관심이 있고 열정을 갖고 취재할 사람을 보낸다.
우리나라 언론계만 그럴까. 많은 직장 초년생들, 아니 대리, 과장급까지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우리 회사 업무량은 피라미드 구조.'
업무량 피라미드의 조직에서 저연차 직원들은 번아웃(burn-out) 증후군에 시달린다. 번아웃으로 헉헉대는 후배들은 탈출을 꿈꾼다. '퇴사는 지능순'이란 말이 언제부턴가 젊은 직장인들의 신조가 되었다. 이런 후배들을 보며 선배들은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라고 혀를 차기도 한다. 정작 본인들은 '보어아웃(Bore-out)'으로 눈치 보며 일을 떠넘기기 바쁘면서 말이다.
보어 아웃 증후군은 지루함과 의욕 상실, 무관심으로 회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월급만 챙기는 상태를 말한다. 아예 대놓고 일하지 않는 프리라이더랑은 조금 다르다. 보어아웃의 특징으로는 (1) 근무 시간에 개인적인 일을 한다 (2) 일이 많은 것처럼 바쁜 척을 한다 (3) 근무 시간에 동료에게 사적인 쪽지나 이메일을 보낸다 등이 있다. 업무에 집중하지 않으니 결과물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의욕조차 없으니 개선의 여지도 없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의 이런 상태가 선배의 덕목이며 어린 직원들에게 일을 몰아주는 게 후배 양성이라고 믿기까지 한다. 친절이 변질됐다.
보어 아웃을 겪는 사람이 조직에 있으면, 주변 직원들, 특히 부하 직원들의 삶이 피폐해진다. 당신의 상사가 보어 아웃 상태라면 이런 말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내가 요즘 좀 ‘다른 업무로’ 바빠서 그러는데 이건 네가 좀 해주라." 그 상사가 무슨 일로 바쁜지 당신은 모른다.
젊은 직원들은 번 아웃으로 회사를 나가고 바쁜 척 버티는 사람만 남으니 조직도 망가진다. 일은 누가 하는가. 이런 조직의 구성원 형태는 차츰 모래시계형 조직이 된다. 비용이 싼 신입은 계속 채용하지만 이들은 몇년 지나지 않아 이탈해버린다..
안타깝게도 보어 아웃의 유일한 탈출 방법은 자신의 자각과 변화 의지뿐이라고 한다. 타성은 늪과 같아서 한번 빠지면 좀처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늪에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 더 깊이 내려앉는다. 자기가 신고 있던 장화를 벗는 게 일단 우선이다. 지금까지 고수하던 보어아웃 업무 습관을 완전히 벗어 던져야 한단 얘기다.
짬이 찰수록 일하지 않는 분위기는 생각보다 사회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보어아웃에서 제 발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이가 들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열정과 함께 책임감마저 적어져 버린다. 그러다 보니 경륜이 쌓인 권위자는 찾기가 힘들어진다.
당신은 어떤가. 번아웃인가 보어아웃인가. 혹은 건강한 조직에서 즐겁게 일하고 있는가. 나이와 짬만 가지고 일을 떠미는 보어아웃 군림자는 거기까지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고 본인의 영혼도 지루함으로 고사한다. 자신이 가진 지성과 경험을 살려 더 나은 업무 결과를 추구하고 후배들을 양성하는 진짜 권위자가 조직과 사회를 발전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