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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Dec 30. 2022

Never give up, 내복 입어

 이렇게 작은 집에 기어이 CD 싸들고 왔다. 큰 마음먹고 처분했다면 오디오도 필요 없었을 테다. CD 수납장과 오디오를 올려두기 위한 가구를 겹쳐 두며 우리 집에서 가장 밀도 높은 공간이 됐다.

 물론, 이사 전에만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작은 집에 살면서도 얼마나 과감하게 물건들을 비우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도, CD를 버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들을 것 같지 않을 CD마저 가지고 있다.

 알파벳 순서대로 차분히 모두 듣겠다며 CD 재생을 하자마자 '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 하는 강력한 샤우팅과 함께 나오는 현란한 드럼에 깜짝 놀라 볼륨을 줄였다가 트랙 3까지 가지 못하고 교체다. 그래놓고 다시 곱게 CD장에 꽂다.

 불과 몇 년 전에 입었던 옷을 비우면서는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취향을 인정하고 젊은이 옷은 련을 갖지 말고 비우자 했으면서 말이다.


 미니멀 라이프도 CD는 버리지 못한다는 구구절절한 이유는 글로도 써 두었다. 이렇게 자꾸 합리화를 하니 남들은 '미니멀 라이프 몇 년 차예요~'라고 할 때 나는 10년 가까이 미니멀 라이프 처에 기웃대면서도 여전히 앞에 '경계성'이라는 수식어를 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와중에 CD를 버릴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를, 그것도 몹시 매력적이며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야 만다.


 그날 아이와 보드게임을 할 때 골라 넣은 CD는 해외에 있을 때 구입했던 Simon&Garfunkle의 앨범이었다. "오, 노래 좋다! 엄마, 내 플레이 리스트에 넣어줘." 아이는 오디션을 보는 감독과 같은 엄정한 표정으로 지시한다.


 CD 봐도 알 수 있지만 CD를 이렇게 쌓아두고도 늘 이용하고 있는 스트리밍서비스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여다보면 나 스스로 '잡식'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 오른다. 록음악은 물론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음악이 국적과 장르를 불문하고 뒤섞여있다.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고 자란 초등학생도 만만치 않다. Charlie Puth, 이무진과 함께 스푸키바나나와 Michael Jackson, 김광석의 음악을 좋아한다. 아이가 직접 만들고 공들여 관리하는 플레이리스트에는 요즘 초등생들 사이 인기 있는 음악은 물론 힙합과 트로트에 K리그 구단별 응원가까지 들어있다. 


아이는 좋은 노래를 발견할 때마다 하나씩 플레이리스트를 채워 넣고 중간중간 잘 듣지 않는 노래들은 버리면서 169곡을 선별해 놓았는데 여기에 Simon&Garfunkle의 노래가 추가된다.

꼭 하트를 누르지 않아도 되는데 아이는 열심히 누른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아이의 플레이스트에 간택되면 왜 이리 흐뭇하고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I am a rock을 비롯 가장 좋아하는 노래 세곡을 넣어주며 이야기한다.

 엄마가 너보다 더 작았을 때 할머니가 이 사람들의 테이프를 사 오셨아마 그때부터 '옛날 팝송'에 빠진 것 같다고. 그리고 한국에서는 발매되지 않은 이 앨범을 해외에서 발견하고 그 테이프를 처음 들날이 불현듯 고, CD를 두 장 사서 한 장은 귀국해 할머니를 드렸다고.


 얼굴에 살짝 올라오는 열기마저 느끼며 옛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를 빤히 보며 아이는 엄마 차례라며 보드게임에 집중하라고 채근을 한다. 그래, 너 아들이다.


 어릴 때 아이를 위한 동요, 애니메이션 ost 등을 따로 묶어놓았던 플레이리스트가 있긴 했지만 엄마가 좋아하는 음악을 아이와 함께 듣는 게 가장 좋다는 한 육아서의 구절을 보고는 따로 요청하지 않을 땐 내가 듣고 싶은 것이 선택의 기준이 된다. 물론 다른 의견의 육아서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원하는 정보만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특히 운전을 하며  차에서 듣는 음악은 마치 음악감상실의 부스에 같이 앉아 듣는 듯했다. 말도 잘하지 못할 때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를 신기하게 끝음절 한 글자씩만 따라 하던 아이는 지금은 가사알 수 없는 외계어로 따라 부르며 자신은 정확한 가사를 말한다 굳게 믿, 임재범의 노래를 그분의 감성으로 부르며 나를 웃게 한다.


 동안 나는 Sia의 노래에 완전히 빠져있었는데 그중에서도  'Never give up' 한 반복하며 듣고 있었다. 뒷자리 카시트에 앉아 듣던 아이가 말한다.

"엄마, 내복 입어, 내복 입어 하는 거야?"


https://youtube.com/watch?v=0NMPt7K9ZRs&feature=shares

찰떡같이 '내복 입어'로 들리시나요?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여전히 아이는 '내복 입어'라고 따라 부른다.  'All by my self'를 '오빠 만세'로 불렀던 코미디언 때문에 그 뒤로는 계속 '오빠만세'로 들린다더니, 아이도 그런가 보다. 뭐 'Never give up'보다 '내복 입어'가 훨씬 더 영양가 있는 조언일 수 있으니 그냥 둔다.


 그리고 언젠가는 아이가 오디오 앞에 앉아 엄마가 들었던 CD들을 한 장씩 들으며 또다시 명치끝의 저림을 느낄 수도 있다는 이유를 하나 더 보태 오늘도 여전히 CD를 꼭 끌어안고 있다.





https://brunch.co.kr/@0707d9594a104b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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