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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성미니멀 Jan 30. 2023

나 산약 했어-룰도 모르는 사람이 이기는 거다

 태어나 30년 동안 했던 모든 경기와 게임의 수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횟수를 아이와 함께 다.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빈도가 줄었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이 하나 키우기가 쉽지 않다. 매번 생각지도 못한 버라이어티 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둘셋 심지어 넷씩 육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을 넘어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가끔씩 내공 가득한 아우라가 풍기는 겸허한 대답이 돌아온다.

 "어느 정도 키워놓으면 그래도 지들끼리 좀 놀아요."

 그리고 뭐든지 내가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 같고 내가 처한 상황이 그 어떤 이의 그것보다 최고의 난도일 거라 느끼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은 그 겸손한 멘트에 또 내 고생을 부각한다. 그래. 자기들끼리 좀 놀면 나을 텐데 외동은 도대체 몇 살까지 놀아줘야 하는 것일까.


 놀이공원 같은 특별한 이벤트는 넘기자.

 일상이 게임이다. 내외 구분 없다. 평생 알지 못했던 나의 운동 신경과 민첩함을 깨달은 것도 아이 덕이다. 승부욕까지 덤으로 알아챘다.

 길을 걸어갈 때 끝말잇기는 기본이고 음식점에서 음식이 나오기 전에 얼마나 다양한 게임을 하는지 세기도 힘들다. 내가 아이만 할 때 했던 게임부터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게임까지 엄청난 종류를 망라한다. 새로운 게임 창조는 물론 심지어 아이가 원하는 보드게임까지 만들어서 했다.


 어릴 때는 져 주는 것도 일이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어야 승부를 조작할 수 있다. 내가 일부러 져 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니까 결국 엄마를 이기게 되는구나' 하는 극적인 기쁨을 아이에게 선사야 한다. 점수차가 너무 많이 나면 그새 거만해지거나 아니면 다른 게임을 한다고 한다. 한 점 한 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하는데 아이에게 진다. 완전히 몸으로 하는 건 진즉에 글렀다. 그나마 앉아서 손만 쓰는 게임들은 좀 나았는데 이제는 이를 악물고, 심지어 말도 시키지 말라며 승부욕을 불태우는데도 진다. 손으로 축구선수를 조작해서 축구공을 넣는 간이 축구게임은 이제 내가 한 골 넣으면 2점씩 올리고 아이는 1점씩 올리는 데도 진다.

어릴 때부터 함께 해 왔던 게임은 모두 아이가 승자다.


 그리하여 최근에 새롭게 등장한 게임이 있다. 민화투.

 말 그대로 깡촌 마을로 여행을 갔다가 너무 할 게 없어서 숙소 서랍에 들어있던 화투를 친 게 시발점이었다. 손주들이 그림 짝을 맞추고 점수를 계산하는 데 재미를 붙이자 친정 엄마는 편의점에서 화투장을 하나 구입해 두셨고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 모일 때 간혹 어른들과 함께 민화투를 치기 시작했다.


 이게 참 재미다.

 어릴 때 할머니가 아주 판판하고 살짝 까슬거린 국방색 담요에 빨간 화투장을 일자로 줄 세우면서 화투를 치시던 모습을 보았고 할머니 집에 모여 가끔씩 어른들이 민화투를 칠 때 손에서 줄줄 화투장이 흘러내리는 사람과 달리 마치 밑에 깔린 화투장과 손에 들린 화투장이 각각 자석의 N극과 S극인 것처럼 짝짝 소리까지 내며 갖다 붙이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도 있다. 무엇보다 백 원짜리 몇 개씩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손뼉을 쳐가면서  큰 소리로 웃고 이야기하고 즐기던 모습이 선하다.


 내가 그러했듯, 아이들도 그렇게 많은 게임들을 제치고 민화투가 재미있나 보다.

 그런데 할머니 집에 갈 때만 치는 화투라 몇 명이 모이면 몇 장을 깔고 몇 장씩 나눠야 하는지 매번 헷갈린다. 똑같이 생긴 애들은 그래도 맞추겠는데 왜 비는 다 다르게 생겼나. 이게 비던가? 이러면서 매번 확인을 해야 한다. 점수 세기는 또 어떤가. 솔 4개를 예쁘게 모아두고 "엄마 나 산약 했어~" 이러고 있다. 꼭 약이 아닌 것들만 네 장씩 모아두고 약이라고 우기는 이 놈들은 그저 귀엽다. 그 와중에 또 열심히 치고 있다. 어쩌다가 오광을 한 때에는 마치 엄청난 행운이 곧 올 것처럼 사진까지 찍어두며 신나 한다.

 재미를 들린 아이는 그 어떤 손주보다 할머니를 귀찮게 한다. 허리가 아프다는 할머니를 꼬드겨서 기어이 화투판을 펼친다. 의욕이 없는 할머니는 아무 패나 막 내주고 아이는 누구 손에 무슨 패가 들어있을까까지 고민해 가며 화투를 치는데 우스운 건 결국 할머니 입에서 "어머, 나 구사니?", "아이고, 홍단이네"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거다. 역시 뭐든지 너무 힘 들여서 하면 안 되는 거다. 힘을 빼자.  


 손주들 중 점수를 가장 잘 세게 된 아이는 이번 설에도 나서서 화투판을 열었는데 이상하게 꼭 1등은 흑싸리를 홍싸리 위에 조신하게 내려놓는 짝도 못 맞추는 사람의 몫이다. 결국 아이는 일기장에 분노에 찬 글씨로 또박또박 적어 넣고 말았다.


"룰도 모르는 누나가 1등을 했다.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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